[한국언론] 양기탁과 대한매일신보

등록일 2002.11.23 한글 (hwp) | 13페이지 | 가격 1,000원

목차

1. 들어가는 말
2. 성장과정과 초기활동
3. 《대한매일신보》와 양기탁
4. 양기탁과 기독교 정신, 그리고 《대한매일신보》에 미친 영향

본문내용

강 양기탁은 신미양요가 일어나던 1871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아직 문호가 정식 개방되지 않았던 시기로 일본과 서구열강으로부터의 개항의 요구가 높아지던 역사적 전통기에 태어난 것이다. 4월 2일 평양 서촌 원장에서 부친 양시영과 모친 인동장 씨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아명을 의종이라 하였다. 가문의 내력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서북인 중 개항 이후 국권운동에 참여한 대부분의 지도급 인사들의 출신성분이 그러하듯 평범한 양인 출신의 가문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우강은 본적지인 평남 강석누 쌍룡면 신경리에서 15세 되던 해까지 한학을 공부하였으며, 매우 총명하여 주위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는 등 그 지방에서 소년 문장가로 이름을 떨쳤다고 한다. 특히 어학에 남다른 재능이 있어 당시 한국인으로서는 흔치 않았던 외국어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한문은 물론, 공부한 기간이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영어를 능숙하게 우리말로 번역할 수 있었고, 일어도 의사소통에 불편을 느끼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천부적인 어학적 재능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겠다. 어학에 대한 남다른 재능이 훗날 그의 사회활동에 큰 힘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이에 반해 대부분의 천재형 인물이 그러하듯 몸은 그다지 튼튼하지 못한 편이었다. 4~5세 때 천연두를 알았고, 체구도 크지 않았으며 장성한 후에는 만성적 위산과다증으로 고생하기도 하였다. 또한 신경이 매우 예민하여 한때는 불면증에 시달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성품은 선체적 조건과는 달리 매우 과묵한 편이었으며, 심지가 대단히 곧았다. 영어와 일어를 잘하면서도 외국어 쓰기를 꺼려한 일이며, 두 차례나 일본에 장기 체류하면서 근대문물을 접했고 더욱이 미국 선교사들과 두터운 교분을 맺고 있으면서도 다른 개화인사들과는 달리 1910년대까지 상투를 풀지 않았던 일, 그리고 한복차림을 고집했던 점 등은 그가 '조선인'으로서의 긍지가 강했음을 말해주는 한편 곧은 성품의 일면을 말해주기도 한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예식원 번역관보로 근무중이던 1905년 11월 '을사5조약'이 체결되자 다음날로 판임관 6등에 해당하는 관직을 미련없이 던져버린 일이며, 1908년 6월 《대한매일신보》의 논설과 일부 기사내용이 문제가 되어 베델에 대한 재판이 있을 때 증인으로 출두하여 문제가 된 반일적인 논설과 기사 등을 모두 자신이 쓴 것이라고 주장한 바도 있다.
      최근 구매한 회원 학교정보 보기
      1.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수와 학교정보이며
         구매한 본인의 구매정보도 함께 표시됩니다.
      2. 매시 정각마다 업데이트 됩니다. (02:00 ~ 21:00)
      3. 구매자의 학교정보가 없는 경우 기타로 표시됩니다.
      최근 본 자료더보기
      추천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