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발해의 성립과 배경

등록일 2002.11.18 한글 (hwp) | 9페이지 | 가격 1,000원

목차

1. 발해의 성립과 정치 사회
2. 수난받는 발해사
3. 남북국의 대립과 교섭
4. 후삼국과 발해유민의 부흥운동
5.결론

본문내용

고구려 유민의 항쟁으로 당은 신성(新城)까지 후퇴해 있었으나 신라의 영토확장은 대체적으로 평양 이남에 국한되어 있었다. 따라서 한반도 북부와 만주 일대에 웅혼하고 있던 고구려의 옛 땅은 고구려 유민이 주축이 된 발해에 의해서 계승되었다.
고구려의 멸망과 함께 당에 의해 영주 지방으로 강제 이주되었던 고구려 유민은 송막도호(松漠都護) 이진충의 반란을(696) 틈타, 대조영(大祚榮)의 군사적 지휘하에 뭉쳐 고구려의 피지배유민이었던 말갈인을 규합하여 동주의 기회를 포착할 수 있었다. 이 때 고구려 구장(舊將) 출신인 대조영은 당의 측천무후(則天武后)가 보낸 이해고의 추격을 뿌리치고 천문령을 넘어 건국의 지리적 조건이 완비된 [계루고지(桂婁故地)]인 동모산(東牟山) 서고성자 부근을 거점으로 진국(震國)을 건설하였다(698). 물론 당이 이를 인정할 리는 만무하였다. 그러함에도 발해는 스스로 군이 아닌 국이라 자처했고, 독자적 연호도 쓰고 있었는가 하면 돌궐과 신라 등에 사신을 파견하여 적극적인 외교활동도 폈다. 이에 당은 705년 그들의 시어사(侍御史) 장행급을 발해에 파견하여 관계 개선을 도모하는 태도를 보였고, 발해는 고왕(高王, 대조영) 천통16년(731)에는 국호를 진(震)에서 발해로 고치었고, 대조영과 그의 아들 대흠무는 당왕조로부터 각각 발해군왕·계루군왕(桂婁郡王)의 칭호를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군왕호칭은 중국중심의 역사관에서 생각할 수 있는 당왕실의 일방적인 것이었고 발해왕실의 태도는 처음부터 국왕을 고수하는 것이었다.
고왕의 뒤를 이은 무왕(武王)은 통치체제를 정비하고 등주(登州)를 공략하는(732) 등 영토확장에 주력하였다. 이에 대동강 이북으로의 진출이 좌절된 신라는 장성을 쌓아(721) 발해의 남하에 대비하는 한편 당과 연합하여 발해를 공격하다 실패하였다(733). 이를 기반으로 문왕(文王)은 소고구려국을 병합하여 요동까지 진출하고 흑수말갈(黑水靺鞨) 등 외세의 위압에 대한 자신감과 높아진 국제적 지위를 바탕으로 국도를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로 천도했다(785).
그 후 성왕원년(成王元年, 794)에 상경으로 환도한 발해는 선왕대(宣王代)에 전국을 5경·15부·62주로 정비하면서 국세를 크게 떨쳐 해동성국(海東盛國)의 칭호를 듣게까지 되었다. 그러나 발해는 그들 자신이 남긴 기록이 없고 {삼국사기}의 서술대상에서도 제외됨으로 인해, 중국과 대등하게 독자적으로 연호를 사용하며 왕위의 장자상속제(부왕제, 副王制)가 확립되어 있었다는 정도 이외에는 왕권의 자세한 실상 파악이 곤란하다.
한편 중앙정치기구를 살펴보면, 발해는 당제의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고구려의 전통을 계승하며 자신의 필요성에 따라 독자적 정치제도를 운영했음을 알 수 있다. 주요 관부인 3성(省)은 국가의 정령(政令)을 입안·심의하는 기능을 맡은 선조성(宣詔省)과 중대성(中臺省) 및 그 상위에서 정령을 집행하는 정당성(政堂省)으로 이루어져 각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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