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학] 대구약령시의 현황과 문제점 및 개선방안
- 최초 등록일
- 2002.11.17
- 최종 저작일
- 20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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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대구 약령시의 제반 문제점
2. 약령시 문제의 해결방안
Ⅲ.결론
본문내용
대구 약령시는 한약재를 판매하는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특수시장의 하나로서, 효종(孝宗:1650~1659)때 경상감영 안 객사주변에서 봄과 가을에 정기적으로 열려 왔던 계절시장이다. 약제가 주로 봄과 가을에 채취 수확되었으므로, 일년 중 춘령시(春令市:음력 이월 초하루부터 그믐까지)와 추령시(秋令市:음력 동지달 초하루부터 그믐까지)로 두 번 열렸다. 대구에서 약령시가 개설 발전하게 된 것은, 경상도 지역이 갖고 있는 태·소백산맥의 준령과 구비치는 낙동강 기슭의 천혜의 약재 생산의 보고(寶庫)로서의 지리적 배경 때문에 일찍부터 약재를 유무상 통하는 교환이 빈번하게 일어났다는 점, 실사구시(實事求是)의 경세가(經世家)였던 경상감사 임의백공의 알선으로 감영안 객사주변에서 약재시장이 열렸다는 점, 1677년(숙종3)에 뒤늦게 경상도에 대동법이 실시됨으로써 종래의 공물용 최상급 한약재가 제값이 보장되는 영시(令市)로 출하되었다는 점등의 여러 조건이 갖추어졌기에 가능하였다. 이렇듯 타 지역에 비해 유리한 사회, 경제, 지리적 제반여건들이 약령시를 개설하고 발전할 수 있게 하였던 것이다. 수 백년 동안 국내외에 명성을 떨치며 성시를 이루었던 대구 약령시는 민족의식 앙양의 집결지로 판단한 총독부가 [약품 및 약품 영업 취체령], [의생 규칙], [조선시장규칙], [조선 한약업 조합 규칙], [전시 총동원 법] 등의 여러 규칙과 법령으로 약령시를 탄압함으로써 그 주체성과 자율성을 잃게 되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