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2년, 공산군 포로수용소 사건과 역사적 의의
- 최초 등록일
- 2012.03.26
- 최종 저작일
- 20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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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여기서는 한국전쟁의 막바지 휴전협상 중에 일어났던 `공산군 포로수용소 사건`과 관련하여 그 역사적 배경과 원인, 경과, 북한군과 유엔군측의 입장, 그 역사적 의의 등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총 5장)
목차
Ⅰ. 서 론
Ⅱ. 본 론
1. 공산군 포로수용소 상황
2. 북한의 공작과 포로 폭동
3. 북한 공작원들의 포로수용소 위장 침투
4. 거제도 포로수용소장 돗드 장군의 피랍
5. 공산군 포로들의 주장과 유엔군의 입장
Ⅲ. 결 론
본문내용
판문점에서 협상이 진행되고 있는 동안 1952년도에 접어들어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유엔군측의 입장에 대단히 불리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전쟁 초기부터 포로수용소에서는 종종 폭동․시위․폭행 등의 사건이 발생하였지만 큰 문제로 확대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포로수용소의 상황은 중공군이 참전한 이후부터는 크게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유엔군은 철수 시 포로를 즉각 부산 주변으로 집결시켰다.
한국전쟁 중 UN군에 포로가 되었던 공산군을 수용하던 장소이다.
1950년 11월부터 고현·상동·용산·양정·수월·해명·저산지구 등 360만평에 포로수용소를 설치하여, 인민군 15만, 중공군 포로 2만, 여자포로와 의용군 3천명 등 최대 17만 3천명을 수용하였다.
이곳에서 반공포로와 친공포로간의 유혈사태가 자주 발생하였으며, 1952년 5월 7일에는 수용소 소장인 돗드 준장이 납치되는 불미스런 사건까지 있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후 폐쇄되었고, 친공포로들은 판문점을 통하여 북으로 보내졌다. 현재는 수용소의 잔존건물 일부만이 곳곳에 남아 당시의 상황을 말해준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