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강 가계와 유지론에 대한 고찰
- 최초 등록일
- 2012.02.27
- 최종 저작일
- 20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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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가계,유지론
목차
I. 죽림칠현과 혜강 P. 1
Ⅱ. 혜강의 은인자중과 절주진언계 P. 1
Ⅲ. 현재 시각에서 바라본 죽림칠현 P. 2
Ⅳ. ?康의 ??家誡??와 ‘有志’論을 읽고 나서 P. 2
본문내용
I. 죽림칠현과 혜강
위진시대는 예교, 명교주의 형식을 벗어나 노장의 현학이 풍미함으로써 자유분방해진 위진 사대부의 학문적, 문화적 풍토로 인간에 대한 심오한 고찰과 예술에 대한 풍부한 이해가 이루어졌는데 그러한 위진 사대부의 문화적 정서를 대변하는 것이 바로 죽림칠현이라고 한다.
이 시기에는 위나라의 사마씨들이 위나라의 왕실을 무너뜨려 진 왕조를 세우려는 격동의 전환기로 사마씨는 진 왕조 정권의 반대파를 색출하는데, 이를 피하기 위해 죽림칠현은 무위자연의 이념에 기반하여, 스스로 쓸모없는 존재가 되어 保身, 保家 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죽림칠현 중에서도 혜강만이 사마씨 집단을 적대시해 그들에게 협력하지 않아 여안사건에 휘말려 40세 젊은 나이로 죽음을 당한다. 이를 보아 죽림칠현이라는 말에 걸맞게 주변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혜강은 강직한 성격의 대나무와 같은 올곧음과 선비의 깨끗함과 의연함을 지닌 듯하다.
Ⅱ. 혜강의 은인자중과 절주진언계
풍전등화와 같은 정치적인 상황 속에서 일신과 가물의 멸문에 대한 위기의식에서 비롯한 은인자중한 처신은 당시 사대부들에게는 최선의 처세였던 것 같다.
사마소 정권에 산도가 혜강을 자신을 대신에 혜강을 관직에 추천하자 혜강은 답서인 여산거원절교서를 보내 자신의 은인자중적인 유지론을 견지하였다. 산도는 혜강의 인품과 능력을 존경하여 그를 추천하였고, 사마소로부터 혜강을 보호하려고 관직 자리를 추천한 것 같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