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사] 백범 김구의 생애
- 최초 등록일
- 2002.11.02
- 최종 저작일
- 20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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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서론]
1.1876년 ~ 해방까지 조선 상황
♣동학농민 운동 및 개항
♣임시정부 수립 및 독립운동
♣일제 강점기
2.해방까지의 김구의 연혁
본론]
1.해방 당시의 정국
♣해방을 위한 임정의 노력
♣민족해방은 2차 대전의 결과물
♣미국 소련에 의한 신탁통치 결정
2.김구 外 건국을 위한 여러 노력들
♣남측 인사들
♣북측 인사들
3.김구의 통일정부에 대한 청사진
4.반민특위 해체의 원인과 결과
♣친일 부역자에 대한 미군정의 무관심
5.김구 암살의 배경과 그 결과
결론]
본문내용
1945년 12월 미·영·소 3국 외상이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한국을 5년간 신탁 통치하기로 결정했다는 내용이 국내에 전해지고 1946년 3월에는 미·소 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다.
미·소 공동위원회 협의안인 '5호 성명'에 대해 국내 정치 세력은 통일적 대응을 취하지 못했다. 결국 미·소 공동위원회는 당시의 상황에서 이루어지기 힘든 힘의 대립과 국내의 반탁에 영향을 받아 결렬되었으며 일부에서는 단독 정부 수립안이 대두되기도 했다.
미군정은 정치적 성향에 의해 좌익에 대해 분열·탄압 정책을 폈는데, 이러한 정책이 강경해지자 조선 공산당은 신전술을 채택하고 좌우 합작을 반대하면서 좌경 노선으로 선회했다.
좌익에 대한 탄압이 극에 달하여 '朝鮮 人民報' 등 좌익 일간지의 정간과 박헌영 등 좌익 지도자의 검거령에 이르러 신전술을 채택한 공산당세력은 대미 비판적 입장을 취하면서 조선공산당과 여운형의 조선 인민당, 남조선 신민당은 북한의 지시아래 남조선 노동당으로 결성하였으나 영남 10·1, 제주 3·4, 서울 폭동 등으로 세력이 약화되어갔다.
한편, 좌우 합작에 의한 민주 국가 건설을 최우선 과제로 삼은 중도세력은 미·소 공동위원회를 조속히 재개하고 임시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좌·우 합작 운동을 전개했다.
우익 세력의 이승만과 김구 및 그들의 추종자 세력은 신탁 통치를 격렬히 반대했다. 친일파를 끼고 돌았던 한민당과 이승만은 반탁 투쟁 이전까지 공산당으로부터 강렬한 비난을 받아왔는데 반탁 투쟁을 통해 공산당을 매국노로 몰아붙이면서 반소 운동을 펴 소련과 합의를 통해 한국 문제를 해결해야 할 미국으로 하여금 빠져나오기 힘든 딜레마에 빠지게 했다. 그리고 김구를 비롯한 중경 임정 세력은 반탁 투쟁을 중경 임정 추대 운동으로 연결시키려 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