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중기 문단과 보한집의 위상
- 최초 등록일
- 2012.01.13
- 최종 저작일
- 2012.01
- 5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2,000원
소개글
고려 중기 문단과 보한집의 위상
목차
없음
본문내용
과거 제도가 도입된 이후 고려의 모습은 크게 변화한다. 고려는 과거제의 도입으로 호족 세력의 견제와 중앙정부의 통제력 강화를 이루고자하였다. 당시의 기득권이었던 호족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으나 결과적으로 호족의 힘을 억제할 수 있었다.
과거제도 중 제술업은 시, 부, 시무책을 시험쳤다. 그 중에서도 인문적 소양이라고 할 수 있는 시와 부가 중시되었다. 인문적 소양이라는 것은 짧은 기간에 익힐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시스템에 의한 교육이 중시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마땅히 이를 뒷받침할만한 시스템의 부재로 인해 사학이 발달하게 된다. 그것은 고려의 과거제도가 지공거 제도라는 독특한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공거는 과거제의 출제위원장이자 채점위원장을 겸한 직책이다. 당시의 합격자들은 모두 지공거의 제자가 되는데 이렇게 몇 년의 세월이 흐르면 지공거를 중심으로 한 과거제 합격자들은 하나의 파벌을 형성하게 된다. 이들은 그 자체로 권력을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 국가에서는 이러한 폐단을 극복하기 위해 공교육인 국자감을 설치하는 등의 모습을 보이지만 폭발적인 교육의 수요를 감당할 수는 없었다. 대표적인 사교육 기관은 문헌공도였는데 이외에도 11개의 사립교육기관이 있었다. 이들은 점차 권력을 차지하여 문벌귀족을 이루었고 문벌귀족들의 힘이 너무 강해진 나머지 왕권을 위협하기도 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이자겸의 난이다.
과거제도의 도입이후 작자층은 두터워졌고 문인 그룹이 형성되었다. 그들은 학습 체험과 창작 기회의 확대로 인해 작품의 옥석을 구분하려는 욕구가 생겨났다. 그리고 이것이 고려의 비평을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 비평은 두 가지 형태를 띠었는데 직접 비평 활동을 하는 것과 선집의 간행을 통해서였다.
고려 비평의 출발은 이인로에서 시작한다. 그는 파한집을 통해 문단의 여러 일화와 개별 작품 평 위주의 비평을 보여주었다. 무신난으로 인해 설자리를 잃게 된 그는 문단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왔지만 예전과 같은 영향력을 보이기는 힘들었다. 그는 훈구귀족의 후예답게 표현의 형식미를 중시하였다. 환골탈태나 점철성금의 이론을 중심으로 파한집을 써내려갔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