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이 낳은 천재 정약용과 실학》
- 최초 등록일
- 2012.01.13
- 최종 저작일
- 20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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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조선이 낳은 천재 정약용과 실학
목차
Ⅰ. 정약용의 생애와 사상
Ⅱ. 실학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1. 실학연구의 흐름
2. 실학의 개념과 범위
3. 실학의 등장, 발전 그리고 유파
Ⅴ. 맺음말
본문내용
1) 정약용의 생애와 사상
본관은 나주(羅州)이고 자호는 다산(茶山)․탁옹(翁)․태수(苔)․자하도인(紫霞道人)․철마산인(鐵馬山人)이며 당호(堂號)는 여유(與猶)이다. 아버지는 진주목사 재원이며, 어머니는 해남윤씨로 두서(斗緖)의 손녀이다. 경기도 광주시 초부면 마재에서 태어났다. 다산의 생애와 학문과정은 1801년(순조 1) 신유사옥에 따른 유배를 전후로 크게 두 시기로 구분되며 그의 사회개혁사상 역시 이에 대응되어 나타난다.
먼저 전기에 해당하는 시기는 주로 관료생활의 시기이다. 어려서 아버지로부터 글을 배우고 15세에 서울로 올라온 후 이가환과 자신의 매부인 이승훈 등으로부터 이익의 학문을 접했다. 이미 이때부터 이익과 같은 학자가 될 것을 결심하고 그의 제자인 이중환․안정복의 저서를 탐독했다. 이처럼 유교경전과 선학의 학문을 연구하는 한편 과거에 응시할 준비를 하여, 1783년(정조 7) 경의진사(經義進士)가 되었다. 이 무렵 이벽을 통하여 서양의 자연과학과 천주교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고 서양서적을 접했다. 1789년 문과에 급제한 후 이듬해 검열이 되었으나 공서파(攻西派)의 탄핵을 받아 해미에 유배되었다가 10일 만에 풀려났다. 곧이어 지평․수찬을 지내고 1794년 경기도암행어사로 파견되었다. 이듬해 동부승지․병조참의가 되었으며 그 뒤 좌부승지․병조참지․동부승지․부호군․형조참의 등을 지내며 규장각의 편찬사업에도 참여했다.
다산은 30대 초까지는 아직 젊은 중앙관료로서 경학사상 등 학문체계는 물론 사회현실에 대한 경험과 인식이 깊지 못했다. 그러나 경기도 암행어사를 비롯하여 금정찰방 곡산부사 등의 직무를 수행하면서 농촌사회의 모순과 폐해를 직접 목격하고 사회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며 이를 실천해보고자 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