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덕기
- 최초 등록일
- 2012.01.10
- 최종 저작일
- 20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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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전덕기의 생애
2. 전덕기의 신앙관
1) 전덕기의 신앙배경
2) 전덕기의 민중지향적 신앙관
3) 전덕기의 사회 참여적 신앙관
3. 전덕기의 민족의식
1) 국민계몽가 전덕기
2) 민권보호자 전덕기
3) 항일투쟁가 전덕기
Ⅲ. 결론을 대신하여 - 전덕기목사의 삶을 평가하며
본문내용
1. 전덕기의 생애
전덕기는 1875년 12월 8일 아버지 전한규씨와 어머니 임씨 사이에서 출생했으며 정동에서 성장하였다. 그가 9세 되던 1884년 8월 아버지가 별세하고 이어서 그해 11월에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의 사망 이후 17세 때까지 숙부의 집에서 살았는데 숙부는 그를 친아들처럼 사랑하였다. 17세 때인 1892년, 그는 당시 ‘양도깨비’로 오해받던 서양 선교사를 찾아갔다. 정동에 있는 미국 선교사 스크랜튼의 집을 찾아간 것이다. 전덕기는 오랑케인 서양인들을 멸시하고 무시하였고, 이들을 괴롭히기 위해 스크렌튼의 집에 돌을 던져 유리창을 깼다. 그러나 스크랜튼은 이를 나무라기 보다 오히려 친절히 대했으며, 이에 전덕기는 감동하여 스크랜튼을 따르고 배우기 시작하였다. 이 배움은 신앙으로 발전하게 된다.
전덕기는 집안의 반대와 이웃들의 걱정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낮에는 스크랜튼의 집에서 고용살이를 하고, 밤에는 성서연구에 몰두하였다. 그는 1896년에 스크랜튼에게서 세례를 받고 정식 기독인이 되었다. 이듬해인 1897년에 미감리교회 입교인으로 등록한 후에 상동교회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1895년에 전덕기는 황정식양과 결혼을 한다.
그는 입교인이 된 후 상동 교회내에 조직된 엡웟청년회에서 활동했고, 1898년 상동교회 속장이 되어 평신도 지도자로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이 당시 그는 교회내의 활동뿐만 아니라 민족의 독립을 위해 독립협회 회원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1901년 5월에 상동교회에서 지방회 공천으로 권사직을 임명받았다. 권사직은 평신도로서 설교 할 수 있는 직책으로,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말씀을 전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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