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당 말기부터 북송·남송 시기를 거치면서 중국내륙 및 북방의 초원지역에서는 각 유목민족들이 성장하여 당시의 중국왕조들 속에서 막강한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이러한 유목민족들은 자신들의 부족을 통합하여 국가를 세우게 되는데 이것을 정복왕조라 한다.
목차
Ⅰ. 서론
Ⅱ. 본론
ⅰ 정복왕조론
ⅱ 요(遼)의 성립과 흥망, 통치체제와 문화
ⅲ 서하(西夏)의 성립과 흥망, 송(宋) 과의 외교관계와 문화
ⅳ 금(金)의 성립과 흥망, 통치체제와 문화
ⅴ 몽고제국의 성립과정
ⅵ 몽고제국의 세력범위
ⅶ 원(元)의 성립과 흥망, 통치체제
Ⅲ. 결론
본문내용
부족통일을 마친 야율아보기는 즉위 3년 후 서남지역의 유목민족인 탕구트, 토욕혼 등을 공격하여 세력범위를 오르도스지방까지 확장시켰다. 야율아보기는 이후 바로 발해를 멸망시키켰으나 귀환하는 도중에 병사하였다.
뒤를 이어 즉위한 야율덕광(요 태종, 926~947)은 수차례 중국에 침입하면서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때 후당의 명종이 죽고 내분이 일어나자 이종가가 황제자리를 탈취하고 말제로 즉위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명종의 사위였던 하동절도사 석경당은 이종가와 알력이 있어 그를 변방으로 쫒아내려고 하였다. 그러나 석경당은 제위를 찬탈하고자 요 태종에게 신하를 칭하면서 연운 16주를 대가로 주기로 하고 원군을 요청하였다. 이를 기회로 태종은 군사를 이끌고 가볍게 후당을 멸망시킨 뒤, 석경당을 황제에 옹립하여 후진을 세울 수 있게 도와주었다. 또 석경당은 매년 금과 비단 30만 필을 세폐로 바치기로 했으며 요와 군신의 관계를 맺었다. 석경당 시대에는 거란에게 지나치게 저자세를 취하여 큰 마찰이 없었으나 석경당이 죽고 조카인 석중귀가 즉위하였는데, 그는 석경당의 거란에 대한 굴욕적인 태도를 불만으로 여겨 태종에게 친서를 보내 요 태종에게 손자라고 칭하고 신하를 칭하지 않았다. 이에 태종은 크게 노해 군사를 일으켜 수도 개봉을 점령하여 후진을 멸망시키고 화북의 대부분을 장악하였다. 947년 태종은 이때 국호를 대요라 하여 중국식으로 고치고 중국식 나라경영을 시작한다.
참고 자료
정병준 외 6명 저,『중국학계의 북방민족, 국가 연구』, 동북아역사재단, 2008
김위현 저, 『거란사회문화사론』, 경인문화사, 2004
신채식 저, 『동양사개론』, 삼영사, 2010
이근명 저, 『중국역사 하』, 신서원, 1993
서울대학교동양사학연구실 편, 『강좌중국사 Ⅲ』, 지식산업사, 2009
김호동 저, 『몽골제국과 세계사의 탄생』, 돌베개, 2010
토마스 바빌드 저, 윤영인 역, 『위태로운 변경』, 동북아 역사재단, 2009
이춘식 저,『중국사 서설』, 교보문고, 19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