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의 영토싸움
- 최초 등록일
- 2011.12.19
- 최종 저작일
- 20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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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의 영토싸움
목차
I. 사건의 배경
1. 개괄
2. 지리적 배경
II. 양국의 입장
1. 싱가포르의 주요 주장 및 논거
(1) 무주지 선점론
(2) 말레이시아의 영유권 부인
2. 말레이시아의 주요 주장 및 논거
(1) 고유영토론
(2) 싱가포르의 국제법 위반
III. 주요 쟁점
1. The Critical Date - 결정적 기일
(1) 의의
(2) 양국의 주장
(3) 법원의 판단
2. 입증 책임
(1) 원칙
(2) 양국의 주장
(3) 법원의 판단
3. 고유영토성
4. 무주지 선점론
5. 묵시적 합의, 묵인, 시효
(1) 묵시적 합의
(2) 묵인
(3) 시효
(4) 호스버러 등대의 건설
(5) 1953년의 조호르 서한
(6) 1953년 이후의 당사자의 행위
6. 권원의 포기, 금반언, 구속적인 일방의 약속
IV. 판결 요지
V. 결어 - 평석
본문내용
I. 사건의 배경
1. 개괄
본 사건은 Pedra Branca(싱가포르에 따른 이름) / Pulau Batu Puteh(말레이시아에 따른 이름)와 미들락스(Middle Rocks), 사우스레지(South Ledge)의 영유권을 둘러싸고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가 다툰 사건 이다. 페드라 블랑카섬에는 영국 식민지 통치시대인 1844년에서 1851년 사이에 등대(Horsburgh Lighthouse)가 세워졌고, 등대는 그 시점부터 싱가포르가 1951년부터 1989년까지 계속하여 지켜왔다.1)
말레이시아가 1979년에 정부에서 출판한 지도에 페드라 블랑카 섬을 ‘풀라우 바투 푸테’라는 이름을 붙여 자국의 영해내에 속하는 것으로 표시를 하자, 싱가포르가 1980년 서면으로 항의를 함으로써 페드라 브랑카 도서 영유권 분쟁은 양국간에 공식적으로 문제가 되었다. 싱가포르는 이 항의공한에서 Middle Rocks와 South Ledge에 대해서도 최초로 영유권을 주장하였다. 또한 싱가포르는 1989년 말레이시아 어민들이 어로작업을 중단할 것을 요구하면서 분쟁이 더욱 심화되었다.2)
이에 대해 말레이시아는 페드라 브랑카에서의 등대건설은 당시 영국이 Johor왕국의 허가를 받고 했기 때문에 영토취득의 효과가 없으며, 더욱이 1847년 당시 페드라 브랑카는 무주지가 아니기 때문에 영토취득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항변했다.3)
그 이후 10년 가까이 협상을 벌이다, 1989년 싱가포르가 사안을 ICJ에 회부할 것을 먼저 제의했고 1994년에 말레이시아가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양국은 제소에 합의를 하게 되었다. 2003년 2월에는 ICJ 회부를 위한 특별협정도 체결되었고 2003년 7월 24일 ICJ에 공식 회부되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