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리지
- 최초 등록일
- 2011.12.18
- 최종 저작일
- 20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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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조선 후기 실학자인 이중환이 썼고, 육당 최남선이 교열을 본 <택리지>가 1971년에 완역되어 `을유 문고`로 첫선을 보인 이래, 1993년에 단행본으로 엮여 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아 오다가 한글 세대를 위해 대폭 보완한 개정판을 내게 되었다. 이번 개정판은 한문투의 문장을 지양하고 문어투의 문체를 매끄럽게 다듬는 데 역점을 두었다. 풍수지리학적인 요소에 의존하면서도 과학적인 입장을 유지, 생활에 유용한 생태학적 관찰을 담고 있어 체계적인 한국 지리학의 원형을 제시한 저작으로 평가받는 <택리지>. 작품에서 드러나는 저자의 해박한 지리적 지식은 신임사화의 주범으로 몰려 나이 30대에 겪어야 했던 좌절의 고통 속에 맺은 결실이라고 할 수 있으며, 한국적 이상향을 염두에 두고 전국 팔도를 돌아다녔던 저자의 인생 역정의 산물이다.
유배 생활과 몰락한 사대부로서 전국을 떠도는 생활을 해야 했던 이중환의 삶.
실학의 대가였던 성호 이익의 재종손이자, 본가의 5대조부터 처가의 직계 4대 모두 문과에 급제한 집안이라는 당시 사회에서는 좋은 조건 속에서 이중환은, 24세 되던 해 증광시 병과에 급제, 정계로 진출한다. 그러나, 10여 년 후 병조 정랑으로 있을 때, 목호룡 사건의 주범으로 몰려 벼슬길이 완전히 막히는 경험을 하게 되고, 그의 나이 36세 때(영조 원년, 1725)는 4월까지 네 차례의 형을 당해야 했다. 수없는 고문 끝에 급기야 영조 3년(1727) 12월, 사헌부의 논계로 귀양을 감으로써 38세의 나이에 정계에서 반영구적으로 축출당한다. 이후 30여 년간 그가 죽기까지 그의 공적인 행로를 짐작할 수 있는 자료는 남아 있지 않다. 단지 그의 저서 <택리지>에서 사대부의 처지를 논한 부분과 영조 28년의 목회경 발문을 통해 그의 처지를 유추해 볼 수 있을 뿐이다. 영조 3년(1727)에 이인좌의 난을 진압한 이후에는 산림에 묻혀 은거생활조차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고 하는데, 참으로 `천지간에 사대부라는 이름을 얻으면 가서 살 곳이 없다`는 것이 그가 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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