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프랑스 왕조와 교회의 관계-프랑스 종교전쟁에서 낭트칙령까지-
- 최초 등록일
- 2011.12.15
- 최종 저작일
- 2011.12
- 10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2,000원
소개글
근대 프랑스 왕조와 교회의 관계-프랑스 종교전쟁에서 낭트칙령까지-
목차
Ⅰ. 서론
Ⅱ. 종교전쟁과 발로아왕조의 몰락
Ⅲ. 부르봉왕조의 성립과 낭트칙령
Ⅳ. 근대 프랑스 왕조와 교회의 관계
Ⅴ.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Ⅰ. 서론
프랑스는 16세기의 중반에서 17세기 초반에 이르는 시간 동안 총 네 명의 왕을 배출했다. 발루아(Valois) 왕조의 프랑수아 2세(François Ⅱ), 샤를 10세(Charles Ⅸ), 그리고 앙리 3세(Henry Ⅲ)와 부르봉(Bourbon) 왕조의 앙리 4세(Henry Ⅳ)가 모두 이 시기의 인물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동시대의 인물들임에도 불구하고 매우 상이한 역사적 평가를 받고 있다. 발루아 왕조의 세 왕은 신체적으로 건강하지 못하면서도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해 프랑스의 정치적인 위기를 불러일으키는 것처럼 묘사되고 있다면, 앙리 4세는 능력 있으면서도 국가를 위해 개종을 할 정도로 고통을 감수하는 관용, 즉 프랑스의 똘레랑스(tolérance)를 베풀어 프랑스를 재건시킨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이러한 차이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필자는 물론 이들이 각자 다른 능력과 역사적인 환경을 지녔다는 것도 중요하지만 종교전쟁의 소용돌이가 만연했던 시대적 조건으로 보아 이들이 당시 교회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하고, 어떤 관계를 맺었는지가 위와 같은 평가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이러한 사실을 주목하여 최종 보고서의 주제를 프랑스 종교전쟁에서 낭트칙령(Édit de Nantes)까지의 상황을 통해서 본 프랑스 왕조와 교회의 관계로 선택했다. 이를 탐구하기 위해 먼저 필자는 이 당시의 역사적 사실을 왕조의 변화를 기준으로 하여 두 부분으로 나누었다. Ⅱ장에서는 종교전쟁과 발로아왕조의 몰락, 그리고 Ⅲ장에서는 부르봉왕조의 성립과 낭트칙령에 대해 서술할 것이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Ⅳ장에서는 근대 프랑스 왕조와 교회의 관계에 대해서 탐구하려고 한다. 필자는 이러한 일련의 확인 작업을 통해 궁극적으로 프랑스의 두 절대왕조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Ⅱ. 종교전쟁과 발로아왕조의 몰락
16세기 초 독일에서 시작된 종교개혁의 바람은 유럽을 강타했다. 이는 전통적인 가톨릭 국가였던 프랑스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프랑수아 2세가 즉위하기도 전에 프랑스 내에서 칼비니즘(Calvinism)은 매우 발달하여 왕족인 나바르, 부르봉, 콩데가와 대영주인 콜리니, 샤티옹, 앙들로가를 비롯한 수많은 귀족들이 개종을 했다. 앙드레 모로아, 신용석 역, 『프랑스사』(기린원, 1998), pp. 158~159.
참고 자료
단행본
정성화 외. 『서양사의 이해』. 학지사, 2004.
다니엘 리비에르, 최갑수 역. 『그림으로 보는 프랑스의 역사』. 까치, 1995.
앙드레 모로아, 신용석 역. 『프랑스사』. 기린원, 1998.
장 카르팡티에 외, 주명철 역. 『프랑스인의 역사』. 소나무, 1991.
참고논문
강석환. 「프랑스 종교전쟁기(1562-1598) 에티엔 파스키에를 통해서 본 ‘정치파’ 사상의 형성과 그 성격」. 『서양사연구』 제43집. 한국서양사연구회, 2010.
김충현. 「낭트칙령에 나타난 국가와 교회와의 관계」. 『서양사학연구』 제14집. 한국서양문화사학회, 2006.
신기호. 「16세기 전반 프랑스 위그노의 종교개혁과 그 사상」. 『신앙과 학문』 제7집 1호. 기독교학문연구회, 2002.
임승휘. 「근대국가의 종교적 기원 : 프랑스 절대왕정과 종교」.『프랑스사 연구』 제12호. 한국프랑스사학회, 2005.
임승휘. 「프랑스 종교전쟁과 관용개념의 탄생 -푸아시(Poissy) 회담(1562)에서 낭트칙령(1598)까지」. 『이화사학연구』 제 31집. 이화사학연구소,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