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미사변의 전말 이후의 조선과 일본
- 최초 등록일
- 2011.12.12
- 최종 저작일
- 20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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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을미사변의 전말 이후의 조선과 일본
목차
Ⅰ 서론
Ⅱ 을미사변 이전의 조선과 일본의 정세
ⅰ 19세기 조선의 정세
ⅱ 19세기 일본의 정세
Ⅲ 을미사변의 배경과 과정
Ⅳ 을미사변에 대한 조선과 일본의 대응
Ⅴ 결론
본문내용
Ⅰ. 서론
1895年 10月 8日(陰曆 을미년 8月 20日) 수백 명의 일본군과 사무라이들이 경복궁을 습격하여 왕비를 시해하고 시체를 불태워 없앤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역사상 전례가 없는 흉악무도한 일이었다. 당시 주한 우치다 사다즈치 영사까지도 “우리 제국을 위해 매우 유감스러운 일로 여긴 역사상 고금 미증유의 흉악한 사건이다”(《日本外交文書》 28-1, No. 424).라고 유감의 뜻을 밝힌 전적이 있다. 그러나 일본정부의 자료 인멸에 이은 외국 기자 매수와 외교 공세로 인해 이 사건은 역사의 그늘 속에서 왜곡된 채 잊혀져가고 있다.
을미사변에 대한 사료로는 일본 영사 우치다의「보고서」와 이 범행에 직접 가담한 고바야가와가 쓴 『민후암살』, 그리고 당시 조선의 법무협판 권재형이 작성한 「개국 504年 8月 사변 보고서」등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자료들 중 그 어디에도 왕비 살해의 진범은 밝혀져 있지 않다. 왕비 민씨가 일본군에 의해 시해된지도 100여 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지만 일본정부는 여전히 을미사변에 관한 부문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다.
내가 왕비 민씨 시해사건. 즉 을미사변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지극히 단순하다. 역사상 전례가 없는 흉악무도한 짓을 벌여놓고도 아무런 사죄도 보상도 없는 일본에 대한 규탄과 이 치욕스러운 사건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깊게 알고 싶은 나의 호기심일 뿐이다. 나는 이 논문을 통해 을미사변이 어떠한 배경에서 일어났으며 그 과정과 결말, 그리고 조선과 일본이 을미사변을 어떻게 대응하였는지 이로 인한 파장은 무엇인지 알아보고자 한다.
Ⅱ 을미사변 이전의 조선과 일본의 정세
ⅰ 조선의 정세
민 왕후는 1851年 여흥 민씨, 민치록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민 왕후가 태어난 시기는 나라 안과 밖이 험난한 시기였다. 안으로는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극에 달해 민심이 극악에 달해있었고, 밖으로는 영국과 러시아가 아시아를 향해 진출하고 있었다. 그리고 동아시아의 막대한 권력을 가지고 있던 중국에서는 洪秀全이 광서성에서 ‘태평천국의 난’을 일으켜 14年 동안 나라를 혼란에 빠뜨렸다.
참고 자료
『명성황후 시해와 일본인』-김문자, 『명성황후는 일본정부가 시해했다』
최문형, 「일본은 왜 명성황후를 시해 했나」
성대경, 「조선 개항기의 외교관계와 수교과정 연구」
박상만, 「일본의 아시아 정책 기조와 동북아 국제정세」
염동용, 「을미사변 후 고종의 國母復讎와 君主專制論」
신명호, 『한일 교류의 역사』
역사교과서연구회, 역사교육연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