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지도에 관한 금문 해석 논란
- 최초 등록일
- 2011.12.03
- 최종 저작일
- 20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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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칠지도에 관한 해석 레포트입니다.
목차
1. 칠지도
2. 칠지도의 발견과 형태
3. 상감문의 해석 논란
3.1. 일본 학계의 논란
3.2. 김석형의 백제 하사설
3.3. 칠지도의 제작 시기에 관한 논란
3.4. 칠지도의 제작 주체에 관한 논란
4. 결론
5. 참고문헌
본문내용
1. 칠지도 1)
칠지도는 길이 74.9cm의 칼로 일본 나라현[奈良縣] 덴리시[天理市] 이소노카미신궁[石上神宮]에 소장되어 있으며 1953년에 일본국보로 지정되었다. 곧은 칼의 몸 좌우로 가지 모양의 칼이 각각 3개씩 나와 있어 모두 7개의 칼날을 이루고 있으므로 칠지도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한국에는 이에 관한 문헌기록이나 실물이 없으나, 《일본서기(日本書紀)》 신공기(神功記)에 "백제가 일본에 하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2) 4세기 후반 근초고왕이 재위할 무렵 일본으로 전해진 것으로 보이며 뛰어난 백제의 제철 기술을 보여준다. 단철(鍛鐵)로 만들어졌으며, 칼몸[刀身]의 앞뒷면에는 61자(字)가 금상감(金象嵌)되어 있다. 오랫동안 비장되어오다가 최초로 공개된 것은 1874년 이소노카미신궁의 대궁사(大宮司) 간마사도모[菅政友]가 명문을 판독하여 발표하면서이다.
그 이후 지금까지 학자들의 노력으로 대체적인 내용과 미지의 글자가 추가 판독되었으나, 그 명문의 마멸 부분 및 그 해석에서 이견(異見)을 보이고 있다. 최근의 명문해석에 따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앞면)태□(泰□) 4년 □월 16일 병오일 정오에 무쇠를 백 번이나 두들겨서 칠지도를 만든다. 이 칼은 백병(재앙)을 피할 수 있다. 마땅히 후왕(旨를 가리킴)에게 줄 만하다. (뒷면)선세(先世) 이래 아무도 이런 칼을 가진 일이 없는데, 백자왕(百慈王)은 세세로 기생성음(奇生聖音:길상어)하므로 왜왕 지(旨)를 위하여 만든다. 후세에 길이 전할 것이다(1993.6월 소진철蘇鎭轍의 해석)."
남북한과 일본 학계에서는 칠지도에 적힌 연호와 전래경위에 관련하여 서로 대립된 주장을 펼쳐왔으며 4가지 이설들이 존재한다. 첫째, 백제왕이 왜왕에게 내려준 것이라는 설, 둘째, 백제왕이 왜왕에게 바친 것이라는 설, 셋째, 동진의 왕이 백제를 통해 왜왕에게 전해주었다는 설, 넷째, 백제왕이 왜왕에게 대등한 관계에서 전해주었다는 설 등이 있다.
참고 자료
EnCyber 두산백과사전
일본서기의 기록에 보이는 신공황후(神功皇后) 52년 기사를 중시하고 즉, 백제왕이 왜왕에 바친 칠지도(七枝刀)가 있었다는 기록을 토대로 일본 학자들은 백제왕의 왜왕에게 헌상했다고 주장한다.
[조유전의 문화재 다시 보기] <15> 칠지도(七支刀)의 정체, 한국일보 2009.12.29
백제 칠지도, 한국 금석문 종합정보영상 시스템
백제 칠지도, 한국 금석문 종합정보영상 시스템
칠지도 둘러싼 한, 일 내셔널리즘, 한겨레 2004.01.31
백제 칠지도, 한국 금석문 종합정보영상 시스템
“한·일 고대사 뇌관 ‘칠지도’ 제작연도 369년 아닌 408년”, 경향신문 2009.10.13
KBS 역사스페셜 [제 16편, 비밀의 문 칠지도], 2005.8.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