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효의 생애와 사상
- 최초 등록일
- 2011.12.03
- 최종 저작일
- 20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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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사 전공 대학원생 자료입니다.
2011년 11월에 만들었고 내용이 자세하고 참고하시기 좋게 정리가 잘되어있습니다.
목차
1. 박영효의 생애
- 수학기
- 국내활동기
- 망명기
- 친일기
2. 박영효의 사상과 활동
1) 갑신정변 이전
2) 갑신정변 , 갑오개혁
3) 1888년 상소문
4) 2차 망명이후
3. 의의와 한계
본문내용
박영효(1861~1939)는 19세기 末의 開化思想家이고, 政治家이다. 그는 1861년에 태어나서 14세 때부터 먼 친척인 朴珪壽의 집을 드나들면서 개화사상을 접하게 되었고, 金玉均 등과 함께 開化派를 형성하게 된다. 哲宗의 장녀 永惠翁主와 결혼하여 駙馬가 된다. 이후 부마라는 신분을 이용하여 고위 관직에 있었으며 한성부판윤을 지내다가 민씨 척족들의 견제를 받아 3개월 만에 경질되었으며, 1884년에 개화파와 함께 조선의 근대화를 위해 갑신정변을 일으켰지만 3일 천하로 끝나게 된다. 그 후 두 차례의 일본으로 망명. 일본에서도 조선의 근대화를 위해 노력하던 중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일본이 이에 개입하면서 일본군과 함께 귀국. 내무대신의 관직을 받고 여러 가지 개혁에 착수하면서 독자노선을 고집함. 1년 후인 1895년 반역음모사건으로 다시 일본으로 망명한 후, 1907년에 다시 귀국 후 궁내부대신이 되었으나 7일 만에 물러남. 그 후에 서서히 친일의 길을 들어서는데, 3.1운동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친일행위를 하게 된다. 일본에서 주는 侯爵을 받음. 박영효는 인생의 전반기에는 갑신·갑오개혁을 주도하였으며, 후반기에는 1920년 동아일보 사장을 역임하는 등 일제로부터 작위를 수여 받고 중추원 부의장까지 친일파로 낙인을 찍히는 삶을 살았다. 따라서, 그에 대한 평가 역시 어느 특정 시기만을 대상으로 할 수 없으며 전반적인 검토가 요구될 것이다.
참고 자료
유병용 외, 2004, 「한국의 인물과 사상 박영효 연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김현철, 2000 「제2차 일본망명시기 박영효의 행적과 정변시도」『근현대사강좌』11.한국현대사연구회
박은숙, 2003 「갑신정변연구」『고려대학교』고려대학교 대학원 학위논문
전봉덕, 1978 「박영효와 그의 상소 연구서설」『동양학』8, 단국대 부설 동양학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