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농업의 근대화
- 최초 등록일
- 2011.11.25
- 최종 저작일
- 2011.05
- 16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3,000원
소개글
한국농업의 근대화를 다룬 자료입니다.
목차
1. 서론
2. 본론
2.1. 시기별 농업정책
2.1.1. 일제강점기 이전 한반도의 농업
2.1.1.1. 고려말~조선초기의 한국 농업
2.1.2. 일제 강점기의 한반도 농업
2.1.2.1. 일본의 조선농업 조사와 그 영향
2.1.2.2. 1910~1920년대 농업정책
2.1.2.3. 1930~1940년대 농업정책
2.2. 근대화론과 수탈론의 주요 논쟁거리
3. 결론
본문내용
2. 본론
가. 시기별 농업정책
1) 일제강점기 이전 한반도의 농업
가) 고려말~조선초기의 한국농업
고려말부터 조선초까지 한반도의 농업 기술 수준은 세종대에 편찬된 ‘농사직설’과 ‘금양잡록’에 극명하게 표현되고 있다. ‘농사직설’의 편찬 발간동기가 전국적으로 농업생산의 효율성 증진을 위하여 앞선 기술을 보급하지는 데 있었으므로, 이에 수록된 농업 기술은 다이 선진적인 농법이었음에 틀림없다. 이 당시의 농법은 고려후기 이래로 줄곧 발달해온 연작상경농법이었다. 논농사에서는 벼의 종류가 올벼와 늦벼로 나누어지고, 재배방법으로는 무삶이법, 건삶이법, 모종법이 있었다. 직파법인 무삶이법이 일반적이었고, 이앙법인 모종법은 가장 한정적으로 행해졌다. 여기서 건삶이법은 강우의 시기적 부적절성 같은 기후조건을 고려한 한국 특유의 논벼 재배방법으로서 봄가뭄에 대한 안전장치였다. 논의 등급을 전적으로 물사정에 따라서 수리안전답, 수리불안전답, 천수답의 셋으로 구분되었다. 벼의 파종시에는 볍씨를 물에 3일간 담그었다가 건져서 섬에 넣고 따뜻한곳에 두어 싹이 트면 무논에다 골고루 흩어뿌렸다 물관리법을 보면, 씨뿌린 후 새가 쪼아먹는 것을 막기 위해서 물을 대고, 제초시에 물을 뺀 다음 다시 대었으며, 모가 약할 때는 물을 얕게 대고 모가 튼튼하면 깊이 대며, 수리안전답에서는 논매기를 마칠 때마다 물을 완전히 빼서 바람과 가뭄에 견딜 수 있도록 하였고, 벼가 익으면 물을 모조리 뺀다고 함으로써 1960년대의 물관리법과 다르지 않을 만큰 진보된 기술을 적용하였다. 또 손과 호미로 3~4회에 걸쳐 제초하여 생산고를 제고하였다.
논에서 이루어진 작물재배양식은, 부분적으로 실시된 모종법보다 직파법을 널리 채택한 결과 자연히 1년1작이 될 수밖에 없었으며, 이는 15세기 이전의 일반적 현상이었다. 밭에서는 밭벼도 재배되었을뿐 아니라, 연중 전후작물을 연결 재배하는 그루갈이법과 전후작물을 일정기간 동안 동시에 재배하는 사이갈이법이 실시되었다. 그루갈이법과
참고 자료
<식민지 일제경제정책-농업을 중심으로>, 레포트월드
<우리나라 청동기 이후 조선 시대까지의 농업사>, 해피캠퍼스
위키백과사전
왕실도서관 장서각 디지털 아카이브
농경생활의 문화읽기, 민속원, 배영동, 2000년
고려시대 사람들 이야기 2(경제, 사회), 신서원, 박용운외, 2001년
농업발전 경제학:경제발전과 농업문제, 박정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