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조지서에 대한 조사
- 최초 등록일
- 2011.11.23
- 최종 저작일
- 20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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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조선시대의 제지술부터 조지서(소)에 관한 심도있는 내용입니다.
목차
Ⅰ. 조선 전기
1. 조선 전기의 조지소(서)造紙所(署)
(2) 조지서의 구성
(3) 조지서의 운영
(4) 지방지소의 성립
2. 제지법
2. 조선지(한지)의 종류
3. 조선지(한지)의 특징
Ⅱ. 조선 후기
1. 조선 후기의 조지소(서)
2. 제지법
Ⅲ. 마무리
본문내용
조선시대의 제지술은 크게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하여 전기와 후기로 나눌 수 있는데, 조선 전기는 우리나라 제지술의 완성기이고 조선 후기는 쇠퇴기라 할 수 있다.
제지술을 완성시켰던 조선시대의 조지서와 조지서에서 만들어진 조선지(한지)에 대한 조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Ⅰ. 조선 전기
1. 조선 전기의 조지소(서)造紙所(署)
(1) 조지서의 기능
조지소는 처음에는 저화지를 생산하기 위해서 태종 15년(1415)에 설치되었다. 실제로 저화를 만들 종이를 생산하기 위해 각도에 닥나무를 심도록 해야 된다고 논의가 활발히 되었다. 또한 사헌부에 올린 글을 보면, 저화를 만들기 위해 각 도에서 만들어 상납한 종이의 두께가 일정하지 않아서 가려 쓰는 폐단이 생겨나게 되자 이러한 폐단을 줄이기 위해 한곳에서 종이를 생산하자는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조지소의 처음 기능은 저화지를 생산하는데 있었지만 그렇다고 계속해서 그 기능만을 수행한 것은 아니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보면 세종 2년에 서울 북쪽 교외의 장의사동(장의문 즉 북문밖 선검정 근처)에 조지서를 조지소를 두고 사대의 표․전․주․벽․문 에 쓸 종이를 만들었다고 하였다. 또한 조지소의 설치는 지방의 부담도 덜어주었다. 그런데 조지소는 이러한 설치 목적과 달리 시간이 흐를수록 실제 저화지를 만드는 일보다 오히려 중국에 공물로 바치는 외교용 종이를 만드는 일에 주력하였다. 그것은 조시소가 설치 될 당시만 해도 저화는 유명무실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조지소에서 저화지를 생산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조지소는 설치 후 곧바로 저화지 생산보다는 오히려 관수품과 왕실용 그리고 사대외교용 종이를 생산하는데 주력하였던 것이다.
당시 생산된 종이의 양이 상당하였다는 것은 세종 14년1432)에 『자치통감』(150권)600부를 인쇄하는데 30만원(한권은 20장)의 종이를 썼으며, 세조3년(1457)에 『대장경』을 50부 인쇄할 때에도 40만 6,200권의 종이를 소비하였다. 이 두 책을 찍는데 이용된 종이는 무려 1,412만 4,000장이나 되었다. 이러한 사실들은 당시에 종이 제조사업이 얼마나 큰 규모로 진행되었는가 하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참고 자료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한지/ 이승철. 현암사, 2002
종이 공예 문화/ 임영주 외 1. 대원사, 2002
조선후기 제지수공업 연구/ 김삼기. 중앙대 대학원, 2003.
조선시대 한지 제조에 대한 고찰/ 최양임. 원광대 대학원,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