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향교와 서원에 대한 비교 분석
- 최초 등록일
- 2011.11.23
- 최종 저작일
- 20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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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향교와 서원에 대해 각각 교육기능, 대상, 건물구조, 설립이념등에 대한 분석과 함께 두 교육기관의 공통점과 차이점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총 13장)
목차
1. 향 교(鄕 校)
2. 서 원(書 院)
3. 전주 향교
4. 임피 향교
5. 익산향교
6. 황강서원
7. 화산서원
8. 향교와 서원의 공통점
9. 향교와 서원의 차이점
본문내용
1. 향 교(鄕 校)
향교는 유교문화 위에서 설립 및 운영된 교육기관으로, 국가가 유교문화이념을 수용하기 위해 중아의 성균관과 연계시키면서 지방에 세운 것이다. 향교의 연원은 유교문화이념이 소개되는 때부터 비롯되었지만, 향교가 적극적으로 설립된 것은 ‘숭유억불’과 유교문화이념을 정치이념으로 표방한 조선시대부터이다. 조선왕조는 유교문화이념을 수용하여 지방 사회질서를 유교문화 논리에 접목시키며, 과거제 운영을 유교교육과 연계시키려 했다. 이러한 사회문화의 기초기구로서의 기능을 담당한 것이 향교이다. 따라서 국가는 군현제의 정비와 함께 지방 수령들에게 향교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과 보호 및 육성을 촉구했으며, 이를 위한 재정적 지원도 적극적으로 했다. 따라서 향교는 지방 수령의 책임 하에 그 운영이 활성화되고 있었다.
1) 교육기능
조선시대에는 향교의 설치를 통해 유학 교육의 기회를 넓혔다. 국가는 모든 향교에 유학을 교수하는 관리인 교관(敎官)을 임명 및 파견했다. 교관은 유학에 소양이 있는 지식인으로 선임하고, 수령과 함께 파견되도록 법제화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교관은 교수(종 6품)․훈도(종 9품)로 구분, 군․현에는 훈도를, 부․목 이상은 교수를 파견하도록 법제화했다. 그러나 수령의 적임자조차 부족한 상황 하에서 교관까지 선임한다는 것은 여의치 않았으므로, 교관의 파견이 법제도대로 활성화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제적 조치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생원 및 진사 또는 경학 지식이 있는 사람들 중에서라도 관리를 선발하여 임시로 교관직에 보임하려고 노력했다. 이처럼 조선왕조는 향교 교육을 위해 여건의 불리함을 감수하면서도 교관의 파견에 많은 노력을 했다. 이는 조선왕조의 유교적 정치 이념을 널리 보급시키려는 의지의 소산이었다. 중기 및 후기로 가면서 관학 교육기관에 대한 비판적 언론과 사학 교육기관의 활성화로 인해 학도들은 향교를 기피하고 서원 및 서당 등의 사학기관을 찾게 되었다. 이에 제독관 및 교양관을 두어 관학의 교육기능을 부활시키려 했으나 그 결과는 부분적 성과에 그쳤다. 이후 향교는 문화적 및 정치적 기능이 강화되어 유교문화 이념의 또다른 성격을 구현하는 기구로 변화되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