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과 구국 의병활동에 대한 분석
- 최초 등록일
- 2011.11.21
- 최종 저작일
- 20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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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여기서는 병자호란 시 청의 침공계획과 조선의 방어계획, 그리고 병자호란의 경과를 알아 본 다음, 국가의 운명이 경각에 이르렀을 때 나라를 구한다는 기치를 앞세운 전국의 백성들이 군사를 일으켜 청군에 대항한 의병활동의 사례를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한근 2002 버전에서도 리딩 및 작성 가능합니다.)
목차
Ⅰ. 서 론
Ⅱ. 본 론
1. 청의 침공계획과 조선의 방어계획
2. 병자혼란의 경과
3. 나라를 구하기 위한 의병활동의 전개
Ⅲ. 결 론
본문내용
선조 33년(1600년)의 왕조실록은 "병서와 선인들의 용병술을 알지 못하고 있는 무사들로 하여금 강한 적을 막아내라고 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지금 병서를 익히고 용병술을 연구하려면 듣는 사람이 냉소할 것이다. 그러나 비록 3년 묵은 쑥이라 할지라도 구하지 않는다면 병을 고칠 날이 없을 것이다."라고 기록하여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인해 전 국토가 유린당하는 굴욕을 당한 이후의 군사력을 강화해야 할 당위성을 지적하고 있다. 이는 국가안보는 구호 또는 의지가 아닌 실천이 중요하며, 그 실행은 기초를 튼튼히 다지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조선 조정과 집권세력은(인조 5년(1627년)의 정묘호란 이후에도) 유교를 숭상하는 숭문천무(崇文賤武) 의식에 젖어 국방력의 강화를 소홀히 했을 뿐만 아니라 대륙의 정세 변화에 따른 실리(實利)를 앞세우기보다는 명나라에 의존한 사대(事大)정책을 추구하여 안보태세를 소홀히 하였다. 만주일대에서 세력을 확장한 후금은 대륙의 새로운 강자로 부상하여 인조 10년(1632년)에는 정묘화약(丁卯和約)을 통해 유지해 오던 형제국의 관계를 군신(君臣)관계로 변경하는 것과 함께 조공의 규모를 늘릴 것을 요구하는 등 온갖 수모와 협박을 가함으로써 주권국가로서의 조선의 위상은 크게 저하되었다. 조선이 후금의 무리한 요구에 대해 단호하게 거절하자 대규모 군사를 일으켜 침공하였는데 이를 병자호란이라고 한다. 난을 피해 남한산성으로 옮겨 간 조정은 불과 60여일을 넘기지 못하고 삼전도(三田渡)에서 국왕(인조)이 적국의 수장(청태종)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예로 항복의식을 치르는 수모와 치욕을 당하였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