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히로부미
- 최초 등록일
- 2011.11.19
- 최종 저작일
- 2010.06
- 6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2,000원
소개글
이토히로부미의 유년시절부터 짚어보고
이토히로부미를 바라보는 한일 양국의 견해차이를 지적한 글입니다.
A+맞았구요,
교수님께 "문장력이 참 좋다"고 칭찬을 받은 리포트 이기도 합니다,
표지부터 서평, 참고문헌까지 리포트의 양식을 다 갖춘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이토 히로부미의 일생
1 소년기
2 청년기
3 정치적 행보
4 조선침략
5. 죽음
Ⅲ. 이토 히로부미를 바라보는 한일 양국의 견해
Ⅳ. 결론
본문내용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의사가 하얼빈 역에서 伊藤博文을 사살했다. 그로부터 백년, 이토 히로부미를 바라보는 한·일 양국의 시각은 너무나 다르다. 일본의 시각에서 이토 히로부미는, 뛰어난 정치가로서 明治時代 일본의 형성과 발전에 능력을 발휘한 日本 근대화의 중추적 인물로 기억되고 있으며, 한국의 시각에서 바라본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의 원흉으로서 조선 통감부의 초대통감으로 조선의 일본 식민지화에 이바지한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이렇게 양국 간에 얽힌 오랜 구원을 풀고 화해를 모색하는 관점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리포트의 주제로 선정하게 되었다.
이토 히로부미의 생가는 일본의 전형적인 농가로, 작은 다다미방 2개와 부엌이 달린 작은 초가집이었다. 이곳은 일본에서 가장 낙후되고 가난한 산골이며 이토 히로부미는 집에 쌀 한 톨 없을 정도로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이토 히로부미는 농민의 아들이라 姓도 없었다. 그 시대엔 무사계급이 아니고는 姓을 붙일 수 없었고 사람대접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토 히로부미는 어린 시절부터 일을 했고 그의 아버지는 우리나라로 치면 중인 정도 되는, 무사계급 아래의 주겐인 ‘이토 다케베에’ 에게 성실성을 인정받아 이토 히로부미는 그의 양자가 된다. 그때부터 `이토`라는 姓을 갖게 됐다. 이토 히로부미는 낮에는 무사의 시중꾼으로 일하고 밤에는 글씨 연습을 했다.
그는 靑年이 되자 신분과 성별을 가리지 않고 학생을 받아들이는 요시다 쇼인의 쇼카 촌에 입학하여 공부를 하였다. 그는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열강의 양이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다카스기 신사쿠, 이노우에 가오루 등 하급 무사출신과 함께 토막 운동에 참여했다. 그리고 조정과 무사정권의 제휴에 의한 정국안정을 꾀하려는 공무 합체론을 주장하던 나가이우타를 암살할 계획을 짰으며, 영국 공사관 방화사건에 기여를 하는 등 권력을 천황에게 돌려주고 서양을 몰아내자고 주장하는 尊王攘夷 운동에 참가를 했다. 그 뒤 "외국과 정말로 싸우고 싶으면 나라를 개방하고, 해군을 키워야 한다"는 사쿠마 쇼잔의 영향을 받아 이토는 외국 문물의 습득을 위해 유학을 결심하고 곧 영국으로 떠났다가, 귀국해 혁신파에 참여한다. 1864년, 조슈 番이 막부와의 싸움에서 막부에 공손한 자세를 보이자, 다카스기 신사쿠 등과 군사를 일으켜 보수파를 타도하기도 하였다.
참고 자료
나카무라 기쿠오/ 이등박문/ 중심/ 2000
사키류조, 이성범역 / 안중근과 이토히로부미 / 제이앤씨 / 2003
김희영 / 이야기 일본사 / 청아출판사 / 2006
위키백과, http://ko.wikipedia.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