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의 사상에 관한 고찰
- 최초 등록일
- 2011.11.15
- 최종 저작일
- 20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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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
목차
1. 서론
2. 본론
3. 결론
본문내용
1. 서론
이황은 우리가 학문하는 목적은 성현이 되는데 있으므로 그것을 성학이라고 하고 심의기능은 (생각한다)는 것인데 배우지 않으면 바르게 생각할 수가 없다 “배우되 생각하지 않으면 사리에 어두워지고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라고 한 것처럼 생각과배움을 일관하는 것은 경(시경,서경,역경)을 지니는 것이라고 이황은 설명한다
이황은 이처럼 경(시경,서경,역경)을 학문하는 근본 혹은 기초로 삼은것은 천리가 인간에게 주어졌다 할지라고 결국 그 천리는 우리의마음을 벗어나지 않으므로 문제에 중심이 파악햇다.
이이는 “마음을 기름에 성을 보존하고 반성하며 행동의 옳고 그름을 살핌에 거짓을 버린다”고하엿다.
성으로 모든 것이 통일된다고 생각할 때 율곡의 사상은 성실 을 근본으로 하는 사상이라 하고 성경은 사람이 진실로 사람답게 되는 근본적인마음가짐이라 하엿다.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는 한국 성리학에서 그 위치가 가장 높은 두 학자라고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이 살았던 16세기에서 이들의 위치는 독보적이였으며, 성리학의 전성기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후에 영남 학파와 기호 학파 라는 학파가 성립이 되어 17세기와 18세기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영남 학파와 기호 학파는 한국 성리학에서 쌍벽을 이루며 그 사상이 전개된다. 이 뿐만이 아니다. 실학이라는 학문의 경향에도 영향을 주어 그 영향은 실로 엄청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성리학적 경향이 16세기와 17, 18세기와는 약간 다른 경향이 일어난다. 이는 우리가 수업시간에 배워왔듯이 역사적은 흐름(배경)과도 결코 무관한 일이 아니다.
조선은 1592년에 임진왜란을 시작으로 하여, 1627년에는 정묘호란, 1636년에는 병자호란을 차례로 당하게 된다. 이로 인해 국력은 쇠약해지고, 인조의 굴욕적인 항복은 문화적 자존심에 상처를 준다. 그리고 성리학중심의 정치체계에 일대 반성과 회의를 불러오게 한다.
뿐만 아니라 16세기의 중엽에 발단된 정치권의 분열은 1590년에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분열되고, 서인은 숙종 대에 이르러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되는 등 지도층의 분열 양상이 노골화 되었다. 계속되는 기근과 전염병의 창궐, 이괄의 난 등 사회적인 위기도 심각하였다. 이러한 복합적인 배경 하에서 17세기와 18세기의 성리학은 다양한 학풍을 가져오게 되었다.
그리고 특히 16세기의 대표적 성리학자인 퇴계와 율곡의 철학적인 특성에 근거하여 크게 영남 학파와 기호 학파가 형성된다. 이들 학파는 퇴계 학파와 율곡 학파라고 불리워질 만큼 이들이 가지는 그 위치는 실로 엄청난 것이였다.
이들의 대립적인 양상의 근거를 따지자면 퇴계는 주리적인 입장에서의 해명을 하고 있었고, 율곡은 주리적인 입장에 한정되어있지 않은, 퇴계의 입장보다는 상당히 개방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