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제국과 기독교 - 니케아 공의회
- 최초 등록일
- 2011.11.03
- 최종 저작일
- 2011.06
- 5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1,000원
소개글
로마제국으로부터 받는 기독교인의 박해는 종결되고, 콘스탄틴의 친 기독교적 정치를 펼치는 시기에, 니케아공의회는 황제의 호의를 받으며 치뤄진다. 외부적으로는 기독교의 박해가 종결되고 참 평화가 이룩되는 듯 하였지만, 실상은 로마제국의 정치적 안정을 위해서 니케아공의회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로마제국과 기독교의 프리즘에서 보는 니케아 공의회는 단순히 한 가지 의미만을 주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의 박해 종결과, 로마제국으로 교회가 종속되는 문제를 보여주는 양면성의 사건을 의미한다.
목차
니케아 세계 공의회
-황제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었다-
서론
본론
1. 논쟁의 발단
2. 논쟁의 전개
3. 논쟁의 마지막
결론
본문내용
콘스탄틴(Constantinus I, 274~337)이 기독교를 공인하면서 기독교 역사는 가장 중요한 전환을 이루어 낸다. 기독교 공인 이전, 교회가 당면한 모든 문제들은 국가와 아무런 연관이 없었다. 하지만 콘스탄틴 이후 사정은 달라졌다. 콘스탄틴은 제국의 안전을 위해 교회 회의를 소집하고 그 결정을 교회가 지키게 함으로 연합을 도모하였다. 서요한, 「초대교회사」(그리심,2003), p.399.
황제는 교회 내적인 일에도 깊이 관여하였으며 이로써 교회와 세속 국가 간의 관계가 더욱 밀접해 지게 된다. W.울만, 「서양 중세 정치사상사」박은구 역 (숭실대학교출판부,2000), p.38.
교회와 국가가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되면서 교회 내 문제까지 세속권력이 동원된다. 325년 기독교 역사상 최초의 세계 공의회인 “니케아공의회(Councils of Nicaea)”의 소집자가 황제였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이 후에도 종교회의의 소집자는 항상 황제가 되었다. 최형걸, 「초대교회사」(기독교문서선교회,1999), p.122.
이 회의의 시작과 끝은 신학적 논제들을 체계화시키고 논쟁들을 의결시키는 대대적인 일을 하였던 것이 사실이지만, 또한 국가의 권력이 어떻게 기독교 위에 군림하였는가를 잘 보여주는 예이다.
이 글은 「그리스도인과 국가 권력 Ⅱ」-이야기마당30의 내용을 발췌 요약한 것이다.
참고 자료
Michel Clévenot, 「그리스도인과 국가권력」
서요한, 「초대교회사」
후스토L.곤잘레스, 「기독교사상사Ι」
부르스셀리, 「현대인을위한 교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