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회의 시대
- 최초 등록일
- 2011.10.31
- 최종 저작일
- 20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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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종교회의 시대
목차
서 론 : 325년의 교회관
Ⅰ. 아리우스 논쟁
Ⅱ. 콘스탄틴노플 종교회의 381
Ⅲ. 에베소 종교회의
Ⅳ. 칼케돈 종교회의
고대 교부들
I. 밀라노의 암부로스(340-397)
II. 제롬Jerome(345-419)
Ⅲ. John Chrysostom(347-407)
Ⅳ. Augustin(354-430)
본문내용
서 론 : 325년의 교회관
1. Catholicism의 정착: 교회는 구원의 시혜자로서 교역자에 의해 감독되는 가시적, 통일적 조직체이다.
2. 325년까지 침례의 양식은 대부분 침수례였으나 약간의 예외도 있었다. 유아세례는 많이 확산되지는 않았으나 이레니우스의 총괄갱신설과 터툴리안의 침례 중생설이 결합되면서 구원받기 위해서는 침례를 받아야 한다는 이론으로 인하여 일부 시작되었으나 침례 후에 지은 죄의 처리 문제가 분명치 않았으므로 많이 확산되지는 않았다. 오리겐도 유아 세례를 옹호하였다.
3. 주의 만찬에 관해서는 성례전이라는 사상(의식자체에 마술적 효과가 있다는 사상)과 희생제사라는 사상
4. 기독교인들은 이때부터 독특한 절기(부활절)를 발전시켰고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범교회적인 종교회의를 주최했다.
5. 기독교인의 삶은 순교자가 나오지 않으므로 금욕주의가 발전되기 시작했다.
Ⅰ. 아리우스 논쟁
아리우스는 동태적 군주신론의 계보를 따라 교육 받았으며 특별히 안디옥의 감독이었던 루시안에게 공부를 했는데 그는 마르고 매력적이나 교만하고 언어가 교활한 사람이었다. 그는 알렉산드리아의 장로로서 320년경부터 독특한 사상을 내기 시작했고 그의 사상은 Arianism이라고 하며 예수는 신성과 인성의 중간적 존재라고 주장하였다. 하나님은 시작이 없지만 성자는 시작이 있다. 하나님은 어느 시점에 아들을 지으셨다. 따라서 아들이 존재치 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 성자는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완전한 하나님도 아니고 아버지보다 열등하나 인간보다는 조금 나은 피조물의 반열에 속한다. 그러자 그 도시의 감독인 알렉산더는 321년에 지방회 종교회의를 개최하여 아리우스를 이단으로 정죄했다. 아리우스는 자기 동창이자 콘스탄틴 황제의 측근이던 Eusebius of Nicomedia을 등에 업었다. 따라서 큰 논쟁이 일어나자 콘스탄틴 황제는 제국의 일치는 교회의 일치를 전제로 한다고 생각 325년에 니케아에서 종교회의를 소집했다. 니케아는 오늘날 터어키의 이즈닉이라는 작은 마을로서 콘스탄틴이 모든 경비를 지출하였고 회의 장소에 화려한 의상을 입고 등장하였다. 전세계에서 318명의 감독이 참가했고 장로와 수행원을 포함하여 약2000명이 참가했으며 이숫자는 전체 감독의 1/6이었다. 아리우스는 먼저 자기의 입장을 설명했으나 감독들에 의해서 거절되자 유세비우스 of Caesarea가 자기 교회의 tlsdkdrbdbfPalestinian Confession을 낭독함으로써 중도적 입장에서 조절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ὁμο-ουσιος(=same substance) cf) 동일본질론(ὁμο), 유사본질론(ὁμοι), 상이본질론(ἑτερο)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