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미륵사
- 최초 등록일
- 2002.10.15
- 최종 저작일
- 2002.10
- 11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1,000원
목차
서론: 익산의 유적 미륵사
본론: 1. 미륵사 창건 배경
1-(1) 미륵사 창건 설화 '연기설화'
1-(2) 연기설화의 의의
결론: 미륵사 가 갖는 역사적 의미 통찰
* 참고 자료
본문내용
본론:1. 미륵사 창건 배경
익산지역에는 무왕(武王)과 관련된 많은 유적이 있다. 국보 제11호인 미륵사지 석탑으로 유명한 미륵사지와 모질메 산성으로 불리우는 왕궁평성, 오금산성, 오금사지, 제석사지, 쌍릉 등 궁성, 절터, 성터, 무덤 등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유적들이 현재까지 전하고 있다. 익산에서 태어나고 성장하여 왕위에 오른 무왕(武王)이 익산을 중심으로 정책을 실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왕위에 오른 무왕은 성왕의 관산성(管山城)의 패전을 설욕하고자 즉위 초에 신라를 대대적으로 공격하였다. 그것이 무왕 3년(602)의 아막산성(阿莫山城)의 전투이다. 백제가 평상시에 유지하는 병력은 약 6만 정도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백제는 이 전투에서 전체 병력의 2/3에 달하는 4만 명의 병력을 상실한 이 전투는 백제 내부에 또 한 번 커다란 위기의식과 혼란을 가져다주었다. 이러한 아막산성(阿莫山城) 전투의 패배로 사회적 혼란을 무왕은 국왕의 권력 강화의 기회로 이용하였으며, 이러한 과정에서 무왕과 관련된 곳인 익산지역에 대한 경영에 박차를 가하였을 것이다. 그것은 하나가 미륵사지의 창건이요, 또 하나는 왕궁평성의 운영이라고 볼 수 있다. 미륵사지(彌勒寺址)는 한국 최초의 석탑인 국보11호인 미륵사지 석탑과 아울러 삼원병립식(三院立式)의 가람배치를 가진 한국 최대의 사찰로 알려져 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