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묘를 다녀와서
- 최초 등록일
- 2011.08.04
- 최종 저작일
- 20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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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 다녀와서 쓴 답사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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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조선이라는 나라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예를 중시하는 유교문화이다. 유교에 바탕을 둔 조선은 어른과 아이의 질서가 분명했고 심지어는 조상에게 까지 정성을 다해 받들었다. 명절에 조상에게 일종의 안부를 묻고 가족의 안녕을 기원하는 제사는 현대에도 많이 행해지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지키고 있다. 조상에게 예를 올리는 제사는 우리 문화의 일부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렇듯 조선을 알기 위해서는 유교와 예를 아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조선왕조의 역대왕과 왕비의 신주를 봉안하고 제사를 받드는 종묘를 조사하기로 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종묘를 우리 고유의 전통이라며 자랑스러워 한다. 하지만 종묘는 유교문화에서 온 것이어서 중국과 베트남에도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와는 차이점이 존재 하고 우리 종묘가 종묘제례악과 함께 잘 보존되어 있어 가치가 인정된다고는 하지만 결국 뿌리는 중국의 유교이다. 정전과 함께 종묘로 불리는 영녕전은 중국 주나라의 것을 본딴 것이다. 이렇게 중국의 문화를 수용하면서 자연스럽게 조선은 중국의 신하나라가 되어버렸다. 작은 나라인 조선이 살아남기 위한 방법이었지만 우리의 주체성은 갖지 못한 것이다.
조선이라는 나라가 고려의 불교를 거부하고 유교를 국교로 삼음으로써 많은 폐해가 나타났다. 성리학은 다른 학문을 철저히 이단으로 배제하였기 때문에 오랜 후에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는데 방해를 했다. 우리 것을 지켰다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결론적으로는 신문물의 수용이 늦여져서 외세의 침략을 받게 되는 것이다. 또한 유교가 계층구조를 분명히 나누었기 때문에 훌륭한 인재를 많이 놓치기도 했다. 허균의 쓴 소설 ‘홍길동 전’에서 홍길동은 비범했지만 서얼이라는 이유로 관직에 나아갈
수 없었다. 이렇듯 유교가 사회 발전을 저해 하였다는 측면이 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조상에게 예를 다하는 일종의 의식이 제사이다. 어떻게 보면 죽은 사람에게 안부를 묻고 앞날을 잘 돌보아달라고 하는 것이 미신이라고 생각한다. 종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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