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농민전쟁의 열강세력의 동향
- 최초 등록일
- 2002.10.02
- 최종 저작일
- 20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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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많은 자료들을 수집해서 만든 레포트 입니다..^^;
목차
1. 보은.금구취화 열강
-.농민군의 방문[榜文]과 그 여파
-.일본 신문사
2. 농민군의 전주입성과 열강
-. 전주입성에 따른 열강의 군사이동
-. 전주입성 후 일본
-. 철병 요구를 직면한 일본
-. 조선 내정(內定) 공동 개혁안 [6.13]
-. 청국의 움직임
-.열강의 움직임.
-.일본의 무력 행세
3.집강소시기 열강의 동향
-. 조선을 동맹체제로의 전환
-. 조선정부를 동맹국으로 포섭하기 계획
-.열강의 개입과 이에 따른 일본의 대처
-. 재봉기한 농민군의 진압
*맺음말...
본문내용
1. 보은.금구취화 열강
-.농민군의 방문[榜文]과 그 여파
1893년 4월 광화문 복합상소 직후 농민 군은 외세에 대한 저항을 제일목표로 제시하고, 외국 공사관과 선교사가 경영하는 학교와 교회 등에 외세에 대한 농민군의 생각을 담은 방문이 나 붙인다. 방문의 내용은 대략 "외세들이 본국으로 돌아갈 것"과 "시행하지 않을 경우 화를 당할 것" 이라는 내용이었고, 농민군이 척왜양을 표방하자 열강 세력들은 신속히 무력 개입 가능 태세를 갖추었으나 [청국군함(4.8) 영국군함(4.14) 일본군함(4.16) 미국군함(4.10) 인천항정박] 이런 열강의 대응과는 반대되게 농민군은 이후 별 다른 조짐이 없어 서울상황은 평온한 상태였다. [서울주재 일본공사(4.20), 인천주재 대리영사보고]
-. 일본 신문사
복합상소후 동학군은 별다른 움직임이 없어 서울 상황은 평온한 상태였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의 서울 사람들의 불안감은 상당히 고조된 상태였는데, 이는 조선 정부 움직임과 함께 일본신문 들이 사태를 보다 확대 선전하여 불안감과 위기감이 증폭되고 있던 것이다. 또한 일본 내의 대외적 강경외교를 주장하는 정치세력의 입장을 반영한던 이 신문들은 일본과 조선의 현안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의 적극적인 외교 자세 촉구와 조선 거주 일본인의 보호책 마련 촉구 등 본국의 조선에 대한 적극적 외교 정책을 요구하는 기사를 실었다고 한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