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균의 생애와 문학관
- 최초 등록일
- 2011.07.11
- 최종 저작일
- 2011.04
- 7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1,000원
소개글
허균의 생애와 사상 및 문학론을 다룬 문서입니다.
목차
1. 삶과 의식의 형성
1-1. 명문가의 출생과 시련
1-2. 사승(師承)과 교우(交友), 그리고 현실과의 만남
2. 허균의 사상
2-1. 「논論」
2-2. 종교에 대한 관심
3. 허균의 문학관
3-1. 감정의 자유로운 발현
3-2. 개성의 중시
4. 마무리
본문내용
1. 삶과 의식의 형성
허균의 본관은 양천(陽川)이며 자는 단보(端甫), 호는 교산(蛟山)·성소(惺所)·백월거사(白月居士)이다. 1589년(선조22년)에 생원이 되었고 1594년에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검열(檢閱)·세자시강원설서(世子侍講院設書)를 지냈다. 1597년에는 문과중시에 장원급제하여 이듬해 황해도도사가 되었으나 기녀들을 많이 데리고 다니며 무뢰배들의 청탁을 받아들였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그는 당대에 통용되던 가치관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행동을 서슴지 않았고 그로인해 스스로가 밝혔듯이 `불여세합(不與世合)`, 즉 세상과 화합하지 못하고 사람들이 꾸짖고 뭇사람들이 멀리하는 삶을 살았다. 그는 벼슬살이에서 여섯 번의 파직과 세 번의 유배를 겪었다. 이는 그가 얼마나 순탄하지 못한 세상살이를 했는지 짐작케 해준다. 그는 서얼(庶孼)들을 규합하여 역모를 꾀한 죄목으로 죽음을 당할 만큼 기존의 체제와 사고방식에서 벗어난 행위를 보여주었다. 광해군이 통치하던 당시는 당쟁이 격화되고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이 드러났으며, 주자학적 이념과 질서가 동요되던 시기였다. 허균은 당시 엄격한 유교 윤리와 예학에 사로잡힌 편협한 시각에서 벗어나 양명학뿐만 아니라 불교, 도교, 천주교 등 여러 방면의 지식을 수용하였고 그로써 급진적 개혁사상을 갖게 되었다. 아울러 독창적인 우리 문학을 주장하며 억압받던 하층민의 입장을 대변하는 글을 남겼다. 기존의 가치와 사고방식에 구속받지 않는 삶을 살았던 그였기에, 후세의 문인들과 여러 사서에서는 그를 부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더욱이 자신의 문집 어디에도 「홍길동전」에 대한 기록을 남기지 않아 고전소설 작자로서의 영예를 위협받고 있기도 하다.
1-1. 명문가의 출생과 시련
그의 가계는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초당 허엽(1517-1580)을 부친으로 허성(1548-1612), 허봉(1551-1588), 허초희(1563-1589)로 이어지는 문명을 날리던 집안으로 그의 문학적 재질과 주변의 환경은 남달랐다.
그러나 그는 출세와 파직으로 점철된 벼슬살이 이전에 의식의 깊은 곳에 많은 비극을 쌓아가고 있었다.
참고 자료
강동엽. 『조선 지식인의 문학과 현실인식』. 서울: 박이정. 2008.
김영주. 『조선후기 문학론 연구』. 서울: 이회. 2009.
김현룡. 『허균』. 서울: 건국대학교출판부. 1994.
박영호. 『許筠 文學과 道敎思想』. 서울: 태학사. 1999.
정병헌. 『고전문학의 향기를 찾아서』. 서울: 돌베개. 1998.
조동일. 『한국문학통사 3권』. 서울: 지식산업사. 2005.
許筠. 『惺所부부藁』. 서울: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1961.
김태준. 「허균의 혁신사상」(『동악어문논집』33, 1998).
이규운. 「허균의 문장론과 그 구현 양상」(성신여자대학교, 2009).
이병순. 「許筠의 反擬古主義 文學論 硏究」(성균관대학교,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