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상사]【A+】불교의 기본 논점과 역사 속의 한국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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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불교 사상의 핵심적 문제 몇 가지1) 석가모니의 생애와 기본적 관점
2)이 번뇌의 끈을 어떻게 할 것인가? 연기, 윤회, 해탈
3) 불교의 세계관
4)종교적인 해결
2. 인도와 중국의 불교
1) 인도 불교의 발전
2) 중국의 불교
3. 삼국시대의 불교
1)우리 불교의 특색
2)불교의 도입과 통일 이전 불교의 역할
3. 통일기 이후의 불교
1) 통일 전후 불교의 과제
2) 원효의 불교
3) 의상의 불교
4) 진표의 법상종을 통해 본 국가와 인민의 관계
5) 하대의 불교
4. 고려시대의 불교
1) 고려 불교의 과제와 태조 왕건의 불교 정책
2) 광종의 불교계 재편
3) 의천의 고려 불교 전통 수립과 천태종 창립
4) 지눌의 불교 개혁 운동과 조계종 성립
5) 고려 말의 불교
5. 조선시대 이후의 불교
1) 조선 초기 불교 배불론과 불교계의 변명
2) 억불책하의 조선 시대 불교의 성격
3) 조선 전기의 불교 정책
4) 임진왜란 전후의 불교 정책
5) 조선 후기 사원 중창과 불교계의 새로운 모색
6) 불교의 근대화와 친일화
8) 해방 이후 어용 불교와 실천 불교에로의 길
본문내용
1. 불교 사상의 핵심적 문제 몇 가지1) 석가모니의 생애와 기본적 관점
ㄱ. 석가모니의 시대적 상황
석가모니는 고도로 형식화된 제의를 바탕으로 공동체의 주도권을 장악한 브라만 중심의 사회가 해체되어 가면서 상업과 유통의 발달에 따라 부를 획득한 부유한 상인들과 확대된 유통망을 필요로 하는 상인들의 지원을 받아 군사력을 키워 주변 지역을 정복해가며 정치의 새로운 주체 세력으로 떠오른 크샤트리아 계급들이 주도하는 사회로 진행하던 시점에 태어났다. 이 전쟁은 인도 전체의 통일 제국 건설을 예견할 통합으로 이어져 갔다.
석가모니는 분명히 이러한 역사적 변화의 혜택을 누릴 크샤트리아 계급 출신으로 복잡한 제사 의식을 위주로 폐쇄적인 카스트를 형성하고 있던 브라만 위주의 사회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데다가 크샤트리아 중심의 통일 왕국 건설이라는 역사적 진행이 불가피한 흐름이었다는 것을 충분히 느끼고 있었다.
그의 출생 설화에 비친 전륜성왕이 되어 통일된 제국의 왕으로 전쟁의 혼란에 빠져있는 백성들을 구제하는 것이 하나의 문제 해결 방법으로 제시되었다. 그러나 전쟁은 끊임없이 반복되었고 수많은 패배자들과 승리자라고 하더라도 전쟁에 시달리는 인민들의 상황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석가모니가 태어난 카필라는 나라는 현재의 네팔 지역, 멀리 히말라야 연봉이 바라다 보이는 곳에 위치한 공화제적 소규모 공동체적 질서에 입각한 소국이었다. 그가 태어날 무렵 이미 상업 이익을 바탕으로 주변 국가를 정복한 영토 국가화된 이웃 강대국 마가다와 코살라 사이에 끼어 그들 사이의 세력 균형에 의지하여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실제 그의 생애 도중 카필라성과 석가족은 이웃한 강국 코살라에 도륙당하고 멸망하였다. 코살라도 결국 얼마 뒤 마가다에 병합되었다.
ㄴ. 문제 해결의 두 가지 극단적인 관점과 중도의 논리
당시 인도에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양극단의 논리가 대립하고 있었다. 하나는 이기적인 자기 중심의 쾌락설이요 그 반대의 극단은 이러한 분쟁의 원인으로 욕구를 들고 욕구의 철저한 배제를 위해 고행하는 바르다마나의 자이나교와 같은 흐름이 있었다.
석가모니는 젊은 시절 궁궐에서의 생활을 통해 결코 채워지지 않는 쾌락의 허망함을 경험하였다. 출가 뒤에는 극단적 고행을 통해 욕망 버리려는 고행만으로 문제가 해결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죽음에 직면하여 극단의 고행 대신 새벽 아침 우유를 얻어 마시고 목욕을 한 뒤 보리수 아래서 얻은 깨달음은 양극단을 딛고 서는 중도였다.
분쟁과 갈등을 일으키는 문제의 원인은 욕구에 있지만 이러한 욕망의 절제는 극단적 고행을 통해서가 아니라 세계의 본질을 이해하여 그것이 채우려 해도 결코 달성될 수 없는 욕구임을 폭로하는 데서만 근본적인 해결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삼법인과 사성제의 기본적인 문제 해결 방법이다.
ㄷ. 석가모니의 정치적 입장
정치적 입장은 이중적인 면모를 보인다. 그는 브라만의 불평등한 폐쇄적 공동체를 극복하고 크샤트리와 상인 계급에 의해 진행되는 통합 왕국으로의 역사적 흐름의 정당성을 인정하고 이에 묵인 내지는 방조한다. 또한 그의 전도 방향을 부유한 상인과 왕가로 잡음으로써 이들의 지원을 받는다. 이것만으로 전제 왕권을 옹호하고 정치적 개혁에 소극적이라거나 정치사상을 결여한 것으로 받아들이기는 이르다. ‘왕 아래 만민의 평등’을 이야기 하는 고대 국가의 제민지배의 원리는 분명 인민들의 평등성을 제고시킨 공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