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A+】여운형
- 최초 등록일
- 2011.06.20
- 최종 저작일
- 20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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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란의 인물, 그는 누구일까
2005년 3월 1일, 해방 60년, 사후(死後) 58년 만에 민족해방운동의 업적 평가, 건국훈장 대통령장(훈격 2위). 그동안 우리 사회가 그를 소외.
공산주의자, 좌경적 사회주의자, 민주적 사회주의자, 민족적 사회주의자, 사회적 민족주의자, 민주주의자, 자유주의자 -> 단순 평가 곤란.
좌파는 혁명적 동지에서 회색적 기회주의자로 변신했다, 미군정과 우익진영은 온건한 민주주의 인사로부터 친공 친북주의자, 공산주의적 기회주의분자 등으로 공격.
“민족해방운동의 매 순간에 그가 있었다.”(강덕상 교수의 평가)
출생과 청년기
1886년 경기도 양평에서 출생.
14세 때인 1900년 배재학당에 입학, 1901년 흥화학교(민영환 설립)로 전학, 1903년에는 우무학당(우체국 업부 교육)으로 전학, 1905년 을사보호조약 당시 비분강개해 자퇴.
1907년 사숙(私塾) 광동학교 설립, 양평에서 국채보상운동 지회 설립.
1908년 집안의 노비해방, 서울 승동교회(애국계몽운동의 본거지) 출입.
1910~1914년, 남궁억이 세운 초당의숙(강릉)에서 청년교육.
1914년 중국으로 망명, 난징(南京)의 금릉대학에 입학, 영문과 수료, 1917년 상해로 떠남
민족해방운동의 시작, 외교독립론
1918년의 상황 : 소비에트정권 수립, 약소민족해방운동 지원 약속, 미국 역시 민족자결주의 표명,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
1919년 전후 처리를 위한 파리강화회의에 조선 대표로 참석하기로 준비, 최초의 근대적 정당인 신한청년당을 결성, 김규식(金奎植) 대표로 파견.
2.8독립선언과 3.1운동에도 직접 관여.
상해 임시정부에도 참가. 외교부 차관으로.
일제 당국자들과도 교섭에 나섬. 당시 일제는 직업적 친일파 양성을 위해 회유 공작을 전개,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이 만들어준 공간을 이용코자 일본행. 임시정부 관직을 사임, 일본 정관계 인사들이 ‘자치론’을 제기하나 즉시독립을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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