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A+】이승만
- 최초 등록일
- 2011.06.20
- 최종 저작일
- 20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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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대통령, 그 빛과 그림자
긍정) 건국의 아버지. 보수우익층의 시각으로 보면 이승만은 오늘의 대한민국을 세운 정통성의 뿌리.
해방 50주년이었던 1990년대 중반 조선일보는 그동안 이승만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극복해보고자 ‘이승만과 나라 세우기’ 특집으로.
‘나라 세우기’란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 남한만이라도 공산주의 침략에서 건져낸 것이 이승만의 훌륭한 치적이라고 보는 것이다
비판) 분단의 주범, ‘전제군주’․독재자․‘민주주의 파괴자’.
단독정부 수립을 최초로 밝힌 1946년 6월의 ‘정읍발언.’ “이제 우리는 무기 휴회된 공위가 재개될 기색도 보이지 않으며, 통일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케 되지 않으니 우리는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 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하여야 될 것이다. ”
미군정 고문 버치, “이승만 씨는 결코 파시스트가 아닙니다. 그는 파시스트보다 2세기 앞섭니다. 순수한 부르봉파에요.”
대한민국 공화정에서두 번이나 쫓겨난 대통령
상해 임시정부의 대통령 이승만, 그는 1923년 상해 임시의정원에서 탄핵안이 발의되고 1925년 결국 대통령직에서 면직.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 1950년대 줄곧 독재정치를 계속하다가 1940년 4.19혁명에 의해 권좌에서 물러남.
이승만, 어떻게 볼 것인가
일반적으로 워싱턴을 ‘미국 건국의 아버지’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는 미국 시민혁명을 이끈 지도자(공화주의 정부를 만든)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미국 인디언들을 억압하고 9.11 테러 이후 현재는 미국 애국주의의 상징.
이승만, 그는 공화정을 이끌었지만 공화주의, 민주주의에 철저하지 못했고 반공이데올로기를 강화하면서 국민을 통제. 그리고 남과 북의 긴장을 유지하는데 크게 기여. 그리고 이승만 사후 40여 년이 된 지금 보수우익 층으로부터 대한민국의 ‘국부(國父)’로 널리 추앙.
이승만과 워싱턴 사이에 어떤 유사성은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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