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농업의 발전과 변화
- 최초 등록일
- 2011.06.01
- 최종 저작일
- 20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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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조선후기의 시대적 상황
2. 농업 기술의 발달과 변화
① 이앙법
② 견종법의 전파
③ 시비법의 발달
④ 기타
3. 농업의 변화가 미친 영향
① 농업경영방식의 변화
② 농민층의 분화
4. 결론
본문내용
조선후기의 시대적 상황
17세기 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포함한 여러 전쟁과 그로 인한 피해로 국토 전체가 황폐해졌고, 농업에 종사하며 살아가던 대다수의 일반 백성들은 피폐한 삶을 살아가야 했다. 왜란이 일어나기 전의 조선의 농지 면적은 전국적으로 170만 결에 달하였다. 하지만 전란이 끝나고 광해군 시대의 농지면적은 54만결로 줄어들었고, 이것은 그만큼 경제적으로 농민의 생활이 어려워진 것은 물론, 국가의 조세 수입이 감소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또한 전쟁 중 사망하거나 농지 부족으로 일어난 기근, 위생상태의 악화로 생긴 전염병 등으로 약 150만 명에서 200만 명에 이르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많은 인명피해가 일어났다고 추정된다. 당시 호구조사 기록은 전란으로 인해 많은 부분이 소실되었으나, 당시 인구를 약 1000만 명 내외로 수준에 이르렀던 것을 감안할 때, 전 인구의 약 15%에서 20% 가량이 줄어들은 것이다. 이러한 인구의 감소와 경제기반의 상실, 막대한 가옥과 재산의 피해는 민심을 흉흉하게 만들었다. 송유진의 난과 이몽학의 난과 같은 반란은 이러한 사회 분위기를 반영하는 사건이다. 또한 왜란 중에 부족한 군량미를 조달하고 부족한 조세수입을 충당하기 위하여 일종의 공명첩인 납속책을 발행하여 관직을 매매하였고, 전쟁의 와중에 수많은 노비문서가 소실되며, 전후 조선의 신분 제도는 혼란에 빠지게 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조선 정부와 백성들은 삶의 터전을 농촌을 원래 모습으로 돌려놓기 위해서 노력하였다. 정부에서는 간척사업을 실시하는 등, 새로운 농토를 개간하도록 백성들을 장려하였고, 수리 시설을 보완하여 많은 수의 크고 작은 저수지를 만들었다. 농민들은 개량된 여러 농사법을 실천해 보는 등 농업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노력하였다. 그 결과 이앙법의 발달과 확산, 견종법의 보급, 그리고 농기구와 시비체제의 개선 등 농업체제의 전환이 일어났고, 이를 바탕으로 하는 집약적 농법으로 조선후기의 농업생산력은 한 단계 더 발전할 수 있었다. 이러한 농업 생산력의 발전은 사회체제의 전반적인 안정과 복구를 추구하고자 하는 당시의 분위기를 토대로 한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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