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렬사보고서
- 최초 등록일
- 2011.05.13
- 최종 저작일
- 20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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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충렬사에 대한 레포트입니다.
목차
□ 충렬사를 들어서며
□ 충렬사 소개
□ 충렬사 구조와 건물
□ 충렬사 구조와 건물
본문내용
□ 충렬사를 들어서며
동장군이 기승을 부리며 겨울한파가 몹시도 우리를 괴롭히는 이때, 때 아닌 포근한 날을 맞아 호국영령과 순국선열이 살아 숨쉬는 충렬사를 찾았다. 토요일 1시를 넘어서는 이 때 충렬사로 들어가는 문 주위로 많은 사람들이 붐비고 있었다. 가는날이 장날이라더니 때마침 충렬사에서 혼례식을 거행하고 많은 하객들이 빠져나오고 있는 중이었다. 일본에 맞서 장렬히 순국한 많은 우리 조상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혼례식을 올린다는 것은 그 얼마나 보람되고 가치있는 일이 될 것인가? 이번 답사는 그 첫 시작부터 느낌이 좋았다. 자 우선 충렬사가 어떠한 곳인지부터 살펴야겠다.
□ 충렬사 소개
충렬사는 임진왜란 때 왜적과 싸우다 장렬히 순절하신 부산지방 순국선열의 영령을 모신 곳이다.
현재의 충렬사는 1605년(선조 38년)에 동래부사 윤훤(尹暄)이 동래읍성 남문 안에 충렬공(忠烈公) 송상현(宋象賢)을 모신 송공사(宋公祠)를 세우고 매년 제사를 지낸 것을 시작으로 1624년(인조 2년)에 선위사 이민구(李敏求)의 건의로 『忠烈祠』라는 사액을 받고 부산진성에서 순절한 충장공(忠壯公) 정발(鄭撥)을 모시게 되었다.
그 후 1652년(효종3년)에는 충렬사를 지금의 자리로 옮기고 선열의 충절과 학행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강당과 동서재를 지어 안락서원이라 하고 사우(祠宇)와 서원(書院)으로서의 기능을 갖추었다.
1709년(숙종35년)에는 충렬공과 충장공이 순절할 때 함께 전사한 양산군수 조영규(趙英圭), 동래교수 노개방(盧蓋邦), 유생 문덕겸(文德 謙), 양조한(梁潮漢), 비장 송봉수(宋鳳壽)와 군관 김희수(金希壽), 겸인 신여로(申汝櫓), 향리 송 백(宋 伯), 부민 김 상(金 祥) 등의 위패를 모신 별사를 옛 송공사 터에 건립하였다.
1736년(영조12년) 별사에 모셨던 분을 충렬사에 합향하였으며 1772년(영조48년)에 다대첨사 윤흥신(尹興信)공을 추배하고 임란 때 송상현공과 정발장군을 따라 순절한 금섬(金蟾)과 애향(愛香)을 위해 충렬사 동문 밖에 사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