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양무운동의 성격(중국근세사)

등록일 2002.07.12 한글 (hwp) | 2페이지 | 가격 3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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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861년 신유정변에 의해 서태후, 공친왕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정권이 성립된 이후, 1894년 청일전쟁까지를 일반적으로 '양무운동'시기라 부른다. 이 운동은 태평천국을 비롯한 5,60년대의 여러 민중운동과 제2차 아편전쟁으로 내외의 위기에 직면한 청조가 '자강'과 '부강'을 표방하면서 강력한 군사력과 각종 근대산업의 육성을 통해 위기를 극복하려는 시도였다.
1860년 영·프 연합군의 북경공격은 청조정부에게는 일찍이 겪지 못한 위기였다. 황제는 열하로 몽진하고 원명원은 소실되었으며 북경은 영·프 연합군의 손에 장악되었다. 황제로부터 사태의 수습을 명받고 북경에 남은 공친왕은 연합군과 접촉하여 그들의 요구를 대부분 들어주는 북경조약을 체결하였다. 그 결과 청조는 구미 각국의 외교사절을 북경에 상주시키고 11개소의 조약 항을 추가로 개방하였으며, 기독교의 포교권을 허용하고 배상금을 지불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신유정변으로 인해 새로운 정권은 함풍제의 두 황후인 동태후와 서태후를 섭정으로 하고 공친왕이 의정왕과 군기대신으로서 실권을 장악하였다. 공친왕은 내부의 도전을 진압한 후 외부의 도전에 대처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영국과의 관계를 안정시키는 것이 필요함을 역설하였다. 이러한 건의에 바탕을 두고 구미 국가들과의 외교문제를 전담할 '총리아문'이 1961년 봄 설립되고 공친왕 및 대학사 겸 군기대신인 계량, 군기대신 겸 호부좌시랑인 문상 등이 총서대신으로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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