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동요 - 신라시대의 향가, 풍요 - 신라시대의 향가, 혜성가 - 통일신라시대의 향가, 도솔가 - 통일신라시대의 향가, 찬기파랑가 - 통일신라시대의 향가, 도천수관음가(도천수대비가) - 통일신라시대의 향가 분석
- 최초 등록일
- 2011.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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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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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서동요 - 신라시대의 향가, 풍요 - 신라시대의 향가, 혜성가 - 통일신라시대의 향가, 도솔가 - 통일신라시대의 향가, 찬기파랑가 - 통일신라시대의 향가, 도천수관음가(도천수대비가) - 통일신라시대의 향가 분석
목차
Ⅰ. 서동요 - 신라시대의 향가
1. 서동요의 원문과 해독
1) 薯童謠
2) 양주동 해독
3) 양주동 현대역
4) 김완진 해독
5) 김완진 현대역
2. 서동요의 배경 설화
Ⅱ. 풍요 - 신라시대의 향가
1. 풍요의 원문과 해독
2. 풍요의 작품이해
Ⅲ. 혜성가 - 통일신라시대의 향가
1. 혜성가의 원문
2. 혜성가의 작품이해
Ⅳ. 도솔가 - 통일신라시대의 향가
Ⅴ. 찬기파랑가 - 통일신라시대의 향가
1. 찬기파랑가의 원문과 해독
1) 원문
2) 양주동 해독
3) 양주동 현대역
4) 김완진 해독
5) 김완진 현대역
2. 찬기파랑가의 배경 설화
Ⅵ. 도천수관음가(도천수대비가) - 통일신라시대의 향가
1. 도천수관음가(도천수대비가)의 원문과 해독
2. 도천수관음가(도천수대비가)의 작품이해
참고문헌
본문내용
백제 제 30대 무왕의 어머니는 홀몸이 되어 서울 남쪽 못 가에 집을 짓고 살다가 그 못의 용과 통하여 낳은 아들이 바로 무왕인데, 어렸을 때의 이름은 서동(薯童)이었다. 기량이 측량키 어렵고, 늘 감자를 캐어 팔아서 가계를 삼았으므로, 사람들이 서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러한 가운데, 신라 진평왕의 제 삼 공주인 선화가 재색이 무쌍하다는 소문을 그가 듣고, 머리를 깎고 신라 서울로 와서 아이들에게 감자를 주어 어울리면서 낮이 익어진 뒤에는 스스로 노래를 지어 아이들에게 가르쳐 부르게 하였다. 이 노래가 삽시간에 서울에 펴져서 대궐에까지 들어갔다. 대신들은 왕께 극히 간하여 공주를 멀리 정배 보내기로 하였다. 공주가 귀양살이로 떠나려 할 때 왕후는 순금 한말을 주어 보냈다 한다. 공주가 배소로 가다 도중에 서동이 나와 절하고 侍衛하여 가니까 공주는 그가 어디서 온 사람인지는 모르나, 흡족히 여겨서 그냥 두었다. 이리하여 함께 가는 도중에, 드디어 소동의 소원이 성취되었는데, 공주는 서동의 이름을 듣고 “동요가 맞았다” 하였다 한다.
武王(古本作武康.非也.百濟無武康)
第三十,武王名璋.母寡居.築室於京師南池邊.池龍交通而生.小名薯童.器量難測.常掘薯蕷.賣爲活業.國人因以爲名.聞新羅眞平王第三公主善花(一作善化).美艶無雙.剃髮來京師.以薯蕷餉閭里羣童.羣童親附之.乃作謠.誘群童而唱之云.善化公主主隱他密只嫁良置古薯童房乙夜矣卯乙抱遣去如.東謠滿京.達於宮禁.百官極諫.竄流公主於遠方.將行.王后以純金一斗贈行.公主將至竄所.薯童出拜途中.將欲侍衛而行.公主雖不識其從來.偶爾信悅.因此隨行.潛通焉.然後知薯童名.乃信童謠之驗.同至百濟.出母后所贈金.將謀計活.薯童大笑曰.此何物也.主曰.此是黃金.可致百年之富.薯童曰.吾自小掘薯之地.委積如泥土.主聞大驚曰.此是天下至寶.君今知金之所在.則此寶輸送父母宮殿何如.薯童曰可.於是聚金.積如丘陵.詣龍華山師子寺知命法師所.問輸金之計.師曰.吾以神力可輸.將金來矣.主作書,幷金置於師子前.師以神力.一夜輸置新羅宮中.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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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홍 : 향가의 해석, 집문당,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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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섭 : 고전문학의 이해와 감상, 문원각, 2003
정병욱 : 한국고전시가론, 신구문화사, 1980
황패강·윤원식 : 한국고대가요, 새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