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농업생산력과 농업경영
- 최초 등록일
- 2011.02.18
- 최종 저작일
- 20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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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조선의 농업생산력과 농업경영에 대한 글입니다.
목차
Ⅰ.들어가는 말
Ⅱ.조선의 토지 ․ 인구와 농업생산량의 관계
1.조선시대 토지와 인구
2.농업생산량 추계
1)호구당 경작면적의 추계
2)토지생산성 ․ 노동생산성의 추계
Ⅲ.조선 전기 농업생산력 발달
1.직접적 요인
2.간접적 요인
Ⅳ.조선 후기 농업생산력 발달
1.수전농업의 생산력
2.한전농업의 생산력
3.수리시설 확대
4.상품작물의 재배
Ⅴ.농촌사회 분해와 광작
Ⅵ.자본주의 맹아론
Ⅶ.맺음말
본문내용
1.직접적 요인
1)농학의 발달 - 농서편찬
조선 전기에는 농서의 편찬 및 보급이 활발했다. 중국 농서를 수집 ․ 보급하거나 국내에서 농서를 편찬하기도 했다. 중국 농서를 민간에 보급시키려는 노력은 고려시대부터 계속 시도되었고 조선 전기에도 주로 전자 선택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세종8년(1429)의 『농사직설(農事直說)』(최초의 관찬농서)의 편찬부터 우리 농서를 보급하는 방향으로 전환되었다.
조선 전기에 가장 널리 보급된 중국농서는 『농상집요(農桑輯要)』와 『사시찬요(四時纂要)』였다.
직접 편찬한 우리 농서로는 먼저 태종 15년(1415)에는 농상집요 ‘양잠편’만을 한상덕이 이두로 번역한 『양잠경험촬요』나, 전해지지 않지만 농상집요를 이두로 번역한 『농서』도 있다.
또 세종 때『농사직설』은 선진지역(하삼도) 노농(老農)들의 관행 농법을 충분히 수집하여 편찬하여 후진지역(함경도, 평안도)으로 보급하였다. 그러나 내용이 주로 주곡만을 중점적으로 서술하여 채소류나 과수, 특작, 식품에 관한 내용은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고 또 지역적 차이를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에서 한계점이 있었다.
성종23년(1492)에는 강희맹이 경기도 지방의 관행농법에 주목하여 경영방식을 개선하기 위해 최초의 사찬농서인 『금양잡록(衿陽雜錄)』을 편찬하였고, 『사시찬요초(四時纂要抄)』 도 18세기 초까지 우리나라의 유일한 원예 농서로서 중요성을 가진다.
그 외 중앙정부가 아닌 지방관들에 의해서도 농서간행이 이루어지는데 그 예로 『신편집성마의방』『촬요신서』『양화소록』등이 있다.
참고 자료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24권, 국사편찬위원회, 1994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33권, 국사편찬위원회, 1997
-김용섭, 『조선 후기 농업사연구』Ⅱ, 일조각, 1995
-한국사연구회, 『(새로운)한국사 길잡이』上, 지식산업사, 2008
-김영준, 「조선 후기 농업생산력 발전과 생산관계에 대한 일고찰」, 한양대 교육대학원 석 사학위논문, 19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