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현과 용재총화
- 최초 등록일
- 2011.02.03
- 최종 저작일
- 20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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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성현과 그의 저서 용재총화를 통해 문학에 나타난 그의 사상을 정리하였다.
목차
Ⅰ. 成俔의 생애와 시대적 배경
1. 생애
Ⅱ. 성현의 사상 및 사물인식
1. 中和思想과 經世적 문학관
1) 중화사상과 그 정치적 의미
2) 경세적 문학관
2. 성현의 사물인식
Ⅲ. 용재총화
1. 저술 배경 및 편찬의도
2. 『용재총화』의 내용분석
3. 『용재총화』에 내포된 사상
본문내용
1439(세종 21)∼1504(연산군 10).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경숙(磬叔), 호는 용재(弁齋) · 부휴자(浮休子) · 허백당(虛白堂) · 국오(菊塢) 등 여러 가지를 썼으나 용재(弁齋)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성염조(成念祖)의 셋째 아들로서 조선 전기의 문신이다.
서울의 남대문 밖 만리현(萬里峴)에서 태어나 중구 중림동과 용산구 청파동 1가에서 거주했으며, 어려서부터 총명함이 출중하였다. 10여 세 되던 때 아버지가 별세하여 두 형과 더불어 무덤 옆에서 3년상(三年喪)을 치렀는데 상중에도 많은 독서를 했다고 한다.
세조 8년(1462)에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예문관에 들어가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를 겸하였다. 1465년에 대교(待敎)가 되고 다음해에 사록(司錄)으로 승진하였으나 이에 만족하지 않고 그해(1466) 5월의 발영시(拔英試)에도 급제하였다. 예종이 즉위하여 6명의 경연관(經筵官)을 두자 그중 한자리를 차지하였는데 왕(王)이 특히 그를 가까이에 두고 경사(經史)를 강론케 했다.
1469년에 성종(成宗)이 즉위하자 예문관 수찬으로 승문원 교검(承文院校檢)을 겸하였다. 당시 형 성임(成任)을 따라 중국 북경에 가는 도중에 읊은 시(詩)를 모아 《관광록(觀光錄)》이란 기행집(紀行集)을 엮었는데 그 훌륭함에 중국인들이 탄복했다고 한다.
성종 5년(1474)에 지평이 되었으나 그의 언사(言事)가 문제가 되어 한성 판관에 좌천되었고 나아가 전라도 도사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부임하기 전에 정부에서 왕에게 계(啓)하여 성현과 같은 학식인은 관직(館職)에 두어야지 외직(外職)에 둘 수 없다고 하여 성균관 직강(成均館直講)에 보(補)해졌다. 이듬해(1475) 한명회(韓明澮)를 따라 두 번째 북경에 다녀왔으며 다음해 문과중시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직제학(直提學)이 되었다. 이 당시 문아(文雅)를 숭상하는 성종에게 8조(條)의 봉사(封事)를 써 바쳤던 것이 칭찬받아 대사간(大司諫)에 제수되었다.
참고 자료
『성현문학연구』, 홍순석, 1992, 한국문화사
『한국한시비평의 연구』, 박수천, 2003, 태학사
「용재총화연구」, 이문세, 1987, 단국대대학원
「용재총화의 문학적 고찰」, 장주옥, 1996, 선신어문학연구회
成宗實錄, 燕山君日記, 虛白堂集, 弁齋叢話解題, 서울의 전통문화
「성현의 사물인식과 미의식(成俔의 事物認識과 美意識)」, 홍순석,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