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불(古佛) 맹사성 분석
- 최초 등록일
- 2011.01.05
- 최종 저작일
- 20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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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불(古佛) 맹사성 분석
목차
1. 들어가는 말
2. 맹사성의 생애 및 일화
3.『강호사시가』
4.『강호사시가』와 『사시가』의 비교
5. 나오는 말
본문내용
고불(古佛) 맹사성
1. 들어가는 말
맹사성(1360~1438)은 우리에게 강호사시가로 잘 알려진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대표적인 명재상이자 청백리의 표본이다. 또한 황희와 함께 조선 초기 문화를 이룩하는데 크게 기여했으며 시문에 능하고 음률에도 밝아 향악(鄕樂)을 정리하기도 했으며, `태종 실록` 편찬을 감독했고, `팔도지리지`를 편찬하였다.
맹사성은 효성이 지극하고 청백하여 살림살이를 일삼지 않고 식량은 늘 녹미 祿米:조정에서 봉급으로 주는 쌀
로 하였고, 바깥출입을 할 때에는 소타기를 좋아해 보는 이들이 그가 재상인 줄을 알지 못했다고 한다. 이처럼 지혜로우면서도 청렴결백한 맹사성의 생애와 그의 대표적인 일화, 그리고 대표적 작품인 강호사시가의 창작 배경과 작품해석, 특징과 장르적 성격, 그리고 작품에 세계상에 대하여 지금부터 함께 알아보도록 하겠다.
2. 맹사성의 생애 및 일화
- 맹사성의 생애
충주에서 태어난 맹사성은 고려 말부터 조선 초기까지의 문신으로, 생애의 전반부는 고려왕조에서, 후반부는 조선왕조에서 살았다. 맹사성은 조선시대 좌의정, 우의정, 영의정 등 3정승을 지낸 것으로 유명하다. 1427년 세종 때 우의정, 1431년에는 영춘추관사 고려와 조선시대에 춘추관에 두었던 관직, 정1품 관직으로 1인이며 영관사(領館事)라고도 한다.
를 겸하여 ‘팔도지리지’를 내어 문화의 기틀을 바로잡아 가는데 견고한 기둥역할을 해냈다.
자는 성지誠之자명自明, 호는 古佛, 본관은 신창新昌으로 온양에서 태어났다. 고불이란 호는 등이 구부정하다 하여 스스로 지은 것이다. 부친은 고려 때 수문전제학과 한성윤을 지낸 맹희도로서, 공양왕 때 효행으로 정려되었으나 정치가 어지러워지자 벼슬을 버리고 온양 오봉산 밑에 살면서 호를 동포라 하였다. 맹사성은 우왕 12년(1386)에 이색이 지공거(시험관)가 되어 실시한 과거에 급제하였다.
맹사성은 권근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1386년(우왕 12)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관직에 등용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6조의 기능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로 각 조의 장관인 판서 밑에 차관급의 참판 제도를 두었을 때 초대 참판을 역임했으며 문신으로선 최초로 군조직의 으뜸 벼슬인 도진무가 되어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하였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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