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화백자에 대해서..
- 최초 등록일
- 2002.06.19
- 최종 저작일
- 2002.06
- 7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1,000원
목차
청화백자의 역사
청자의 쇠퇴와 백자의 발생
청화백자(靑畵白磁)의 명칭(名稱)과 발생(發生)
백자(白磁)의 요지(窯址) 및 원료(原料)와 연료(燃料)
청화백자의 시기구분
본문내용
조선왕조를 개창한 태조 및 개국공신들은 처음에는 고려의 제도를 따랐으나 태종때에는 고려의 제도를 대폭 개혁하여 문물제도가 완비되어 조선왕조 500년의 제도적 기반이 마련되었고, 세종대에 와서는 닦여진 기반과 제도 위에 민족문화의 기틀을 정립시킬 수 있었다.
『세종실록』「지리지」의 도·자기소에 관한 자료조사는 도자기 생산을 위한 국가적인 시책이 세종대에 와서 정비되었음은 물론 국초부터 나아갈 방향이 제시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태조이래 세종연간의 굳건한 기강은 세종조이후 허물어져 사회적으로 분에 넘치는 사치풍조가 상하에 팽배하게 되었다. 그 가운데서도 중국산 청화백자를 사용하는 사치풍조는 더욱 심하여 화자기의 무역과 사용을 금하는 조목이 제정되기도 하였다.
16세기 연산군과 중종대에는 15세기 후반부터 시작되었던 사림(士林)과 훈구세력(勳舊勢力)의 대립·투쟁은 국력의 약화로 전국 각지의 사기장(沙器匠)의 교대로 부역노동으로 충당되던 관영수공업체제는 국가의 재정결핍과 그 모순성으로 인해 서서히 붕괴되어 가는 현상이 일어난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