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조광조의 개혁정치와 기묘사화
- 최초 등록일
- 2010.12.23
- 최종 저작일
- 20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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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조선시대 조광조의 개혁정치와 기묘사화에 대하여 다루었습니다.
목차
1) 趙光祖의 정치활동과 사회개혁
(1) 위훈삭제의 배경
(2) 위훈삭제 추진과정
2) 조광조와 기묘사림과의 관계
(1) 사림파의 성장과 배경
(2) 조광조와 기묘사림
3) 趙光祖의 사회개혁
(1) 조광조의 소격서 폐지운동
(2) 소격서 폐지의 의미
(3) 향약실시 주장의 의미
(4) 현량과 실시의 의미
본문내용
11. 조선시대 조광조의 개혁정치와 기묘사화
1) 趙光祖의 정치활동과 사회개혁
(1) 위훈삭제의 배경
기묘사림이란 기묘사화의 이전 세력인데, 후대의 용어를 인용하여 일반적으로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피화된 신진사류들을 지칭한다. 따라서 이들은 중종반정 이후 1519년 (중종 14년) 기묘사화까지의 정치과정에서 결집되고 구체화된다. 중종반정으로 정권을 장악한 쪽은 물론 공신으로 책봉된 세력이었다. 전례 없이 107명에 달하는 공신의 구성요소는 복잡하여 成宗ㆍ燕山君代처럼 훈구 대 사림의 정치구도와는 달랐다.
中宗초부터 한 10년경까지의 정국운영의 추이를 본다면 朴元宗(박원종)ㆍ柳順丁(유순정)ㆍ成希顔(성희안)의 이른바 反正 3대장과 일부 공신계가 요직을 차지하고 비공신계의 인사들이 나머지 관직을 구성하는 형세를 이루었으며 종래의 훈구계열이 공신계의 한 축을 형성하는 정치구조였다. 1514년 (중종 9년)까지의 政曹(정조)는 공신 중심의 지배체제가 유지되었기 때문에 비록 소수의 사림파가 등장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그 세력이 미약하여 영향력을 제대로 행사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9년 이후 공신세력이 쇠퇴하고 비공신계 훈구세력이 그 주축을 이루고 있는 상황에서 鄭光弼(정광필)ㆍ安(안당) 등 사림세력에 대하여 깊은 이해를 하고 있는 훈구계 정치인들은 사림파 진출의 결정적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그러나 사림파는 정조의 상위층까지는 진출하지 못하고 郞官으로의 진출에만 그치는 수준에 머물고 있었다. 한편, 언관으로의 진출은 정조에 비해 훨씬 활발하였다.
참고 자료
최락도,“趙光祖의 政治思想과 國政改革에 대한연구” 중앙대학교 대학원 博士學位論文,2001, p.117.
최이돈,『朝鮮中期 士林政治構造硏究』一潮閣,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