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와 호족
- 최초 등록일
- 2010.12.23
- 최종 저작일
- 20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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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삼국시대와 호족에 대하여 다루었습니다.
목차
7. 후삼국시대와 호족
1) 신라말기 사회의 동요와 地方豪族(지방호족)의 대두
2) 후삼국의 분열과 고려의 통일
3) 궁예의 정사속의 최후, 전설속의 죽음
(1) 궁예의 비참한 종말을 재구성해 보다
(2) 정사와 다른 민간전승 속의 궁예의 최후
4) 太祖의 호족연합정책과 정치이념
5) 왕권과 호족
6) 호족의 문화
본문내용
7. 후삼국시대와 호족
1) 신라말기 사회의 동요와 地方豪族(지방호족)의 대두
『三國史記』에서는 신라의 역사를 上代 中代 下代 세시기로 구분했는데, 중대는 신라의 전성기로서 武烈王(무열왕)의 직계자손들에 의한 왕권의 전제성을 그 특징으로 한다.
그러나 중대 말경인 景德王(경덕왕)때 와서는 왕권의 강화도 한계점에 도달하여 방계의 진골귀족들이 다시 대두하게 되었다. 신라의 정치와 사회운영의 기본원리로 기능하던 骨品(골품)제도가 모순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 경덕왕은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무열왕 이후부터 추진해 왔던 귀족세력의 억제를 위한 시도로서 漢化政策(한화정책)을 근간으로 하는 정치개혁을 실시했으나, 별다른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다음 해인 惠恭王(혜공왕)때 마침내 골품 제도의 모순은 커다란 반란으로 폭발했다.
혜공왕은 96각간(족장)의 내란과 같은 방계귀족들의 반란으로 살해되고 중대 왕권은 무너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어 宣德王(선덕왕)때부터 방계귀족들이 왕위에 오르기 시작했는데, 그때부터 마지막 敬順王(경순왕)때까지를 하대라고 한다.
이러한 중대에서 하대로의 변동은 왕권의 전제주의적인 경향에 대한 진골귀족들의 반항으로 초래된 것이었기 때문에 하대의 신라사회는 귀족연립적인 방향을 걷게 되었다. 이제는 왕이라 하더라도 귀족 전부의 대표자일 수는 없다. 그를 추대한 일파의 대표자에 불과했다.
참고 자료
한국사특강편찬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