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신문의 역사
- 최초 등록일
- 2010.12.23
- 최종 저작일
- 20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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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근대로 부터 시작하는 한국 신문의 역사를 알아본다
목차
1)근대신문의 출현
2)식민지 시대의 신문
3)해방 후의 신문
본문내용
한국 신문의 역사1)근대신문의 출현
조선시대에는 조정에서 발표하는 소식을 필사해서 전하는 ‘조보’와 같은 전근대적 신문현상이 있었다.
<한성순보>와<한성주보>1883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신문 한성순보가 창간되었다. 순한문을 사용했으면 열흘에 한번씩 발행 되었다. 하지만 1884년 갑신정변의 실패로 모든 시설이 소실되었고 1년 만에 폐간되었다. 이 신문은 개화파가 국민에게 세계정세를 알리고 선진문물을 소개하며, 과학지식을 보급하려는 취지에서 발간했다. 한성순보가 폐간되고 14개월 만에 주간신문형식의 한성주보가 창간되어 2년 반 동안 발간되었다.
최초의 민간지 <독립신문>
서재필이 미국 망명에서 돌아오면서 1896년 4월 7일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지 <독립신문>을 창간했다. 순 한글로 격일간으로 4면을 발행했다. 이신문은 창간사에서 민주사상의 함양과 자주 독립사상을 표방하고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논조를 폈다.
민족주의적 민간 신문들의 활동
독립신문 창간이후 독립협회 세력이 주축이 되어 매일신문, 제국신문, 황성신문 등의 신문이 잇따라 창간되었다. 매일신문은 순 한글 신문으로 당신의 진보적 청년층을 기반으로 삼았고, 제국신문은 순 한글을 사용하여 여성 세력을 대변하는 신문으로 자처했다. 황성신문은 국한문 혼용체를 사용하여 개신 유학적인 전통을 따르는 특성을 보였다. 이 신문들은 반일여론을 조성하여 외세의 침략을 저지하려했다. 1904년 러일전쟁이후 일제는 언론탄압을 더욱 강화했다. 황성신문은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논설로 일본에 저항하였다. 결국 황성신문은 정간당하고 장지연은 구속된다. 이 상황 속에서 영국인 베델이 발행하는 대한매일신보가 신문을 통한 민족운동의 중심으로 활약했다. 하지만 일본은 1907년 국채보상기금횡령사건을 조작하여 양기탁을 구속했고, 1908년 베델을 추방했다. 그리고 1907년 광무신문지법을 공포하여 언론탄압의 제도적 토대를 마련하였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