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고간섭기와 오늘날의 한.미관계
- 최초 등록일
- 2010.12.13
- 최종 저작일
- 20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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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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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서론
2. 金剛山 長安寺와 奇皇后
3. 金剛山 楡岾寺와 楡岾都監
4. 寶蓋山 地藏寺의 1,2차 重修
본문내용
開城府 남쪽에 위치했던 地藏寺는 그 창건시기가 전하지 않고 단지 원나라 간섭기에 들어와 지장사 승 慈惠의 노력에 의해 중수된 사원이었다.. 자혜는 승려의 신분이었지만 당대의 大儒學者며 관료였던 李齊賢과 돈독한 친분 관계를 가졌던 인물로서 스승의 命에 따라 지장사의 중수에 앞장섰던 주인공이다. 앞에서 본 長安寺 승 굉변이 그랬던 것처럼 자혜도 지장사의 중수를 위하여 몸소 元나라 북경으로 가 고관관료들에게 그 비용을 요청하다가 그 소식이 中宮에까지 전해져 그곳의 內帑金을 보시 받아 절을 중수하고 그 碑文까지 세웠던 것이다. 기록에는 施主의 이름이 분명히 전하고 있지는 않으나 中宮의 내탕금을 받았다는 점으로 볼 때 그 시주는 원나라 제2황후로 있던 奇황후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원의 간섭기에 중수된 지장사가 얼마 가지 못해서 또 한번의 중수를 할 수밖에 없는 시련이 공민왕10년(1361)에 닥치게 된다. 공민왕 10년은 원나라 황실의 분쟁과 귀족간의 알력을 틈타 각지에서 봉기한 韓人 叛亂軍인 紅巾賊이 元軍의 공격을 받고 고려에 제2차로 침입해 들어온 시기이다. 그 해 10월에 10여만의 홍건적들이 압록강을 건너 西北面의 여러 성을 함락시켰고, 마침내 11월에는 개경을 점령하게 되어 공민왕은 福州(安東)로 피난을 떠나는 시련을 겪게 되었다. 이때의 홍건적의 침입으로 개경의 궁성이 전소되고 각지의 수많은 문화재와 사원이 불타는 피해를 입게 되었는데 개성부 남쪽에 위치해있던 지장사도 그 참상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당시 절이 불타고 3분의 1만이 남아있는 현실에 직면하게 되자 승 자혜는 다시 지장사의 중수를 계획하게 된 것이었다. 두 번째의 지장사 중수의 佛事에 참여한 인물들을 살펴보게 되면 먼저 元나라의 皇妃, 고려의 禧妃尹氏가 보이고, 鐵原君 崔孟孫, 監承 崔忠, 이제현의
-저작권-반재호
손자 되는 政堂文學 李寶林, 사위 되는 朴東生이 있다. 여기서 이제현의 손자와 사위가 지장사의 시주로 나서게 된 연유는 이제현이 생전에 있을 때 승 자혜와 매우 돈독한 친분관계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