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프랑스 혁명에 대한 전통주의적 해석입니다목차
<목차>Ⅰ 세계사 속의 프랑스 혁명
Ⅱ 프랑스 혁명의 신화
Ⅲ 현대사에서의 프랑스 혁명
본문내용
속의 프랑스 혁명프랑스 혁명 직전, 유럽의 대부분은 구체제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다. 교회는 절대권력을 가진 군주를 신의 대리인으로 간주하고, 그는 그 대가로 자신의 종교를 신민들에게 강요함으로써 교회의 귄위를 지켜주었다. 절대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군주는 영주의 권위와 성직자의 정치적 영향력을 무너뜨려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사회적 우위는 유지시켜주었다.
군주는 국가의 영토적 행정적 틀을 형성하였지만 국민적 통합은 불완전한 상태로 남았다. 군주는 주와 도시에 자치권, 자유 같은 특권을 부여하였다. 그리고 귀족이나 성직자 등 직종에 따른 집단에도 특권을 부여하였다. 따라서 사회는 계서화되고 부분적으로 ‘법인체적’이었다. 하지만, 절대주의 통칙(일명 경멸의 폭포)에 의해 시민이 이미 형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영토적, 사회적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이러한 체제는 자신들의 권위를 빼앗아간 군주에 대해 비난하고 나선 특권계급이 가진 과거의 잔재와 관련된 문제와 10세기 이후 중상주의의 도움을 받아 동산(상업, 산업, 금융)을 소유하고 지식과 교양을 겸비한 부르조아지가 역시 권력에 참여하기를 바랬기에 군주에게 대항한다는 점에서 미래와 관련된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여기서 부르조아지는 군주에게 대항한다는 점에서 특권계급과 제휴할 수 있었고, 동시에 귀족과 같은 권력과 자유를 요구했기에 특권의 폐지와 권리의 평등을 요구하면서 특권계급과 대립관계에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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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C 말 이런 구체제의 문제들은 불균형한 경제발전으로 인해 유럽의 여러 지역에서 상이한 모습을 띠고 나타났다. 중-동부 유럽은 새로운 해상무역 정복에 참여할 수 없어 동-서 유럽의 차이가 더욱 심화되었으며, 이에 새로 형성도니 여러 커다란 국가들은 중상주의정책을 채택하고 부르조아지의 힘을 빌어 국부의 증진과 체제의 정비를 꾀하는 계몽전제군주제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부르조아지는 소수에 불과하였고, 귀족들은 군주에게 복종하고 봉사한 대가로 농민들에 대한 무제한적인 권위를 보장받았다. 그런 농노제가 동쪽으로 가면서는 노예제와 유사한 양상을 보였다.
남부 유럽, 특히 이베리아 반도에서 일어난 가톨릭의 반동은 자유로운 지적 생활을 방해하였으며, 특권계급은 활발하지 못하고 부르조아지의 성장도 느렸으며 농민들은 왕권의 보호를 받고 있었다.
네덜란드와 영국 그리고 미국 등의 해양국가들은 모두 신교국가로, 대륙국가와는 뚜렷한 대조를 보였다. 네덜란드의 부르조아지는 세기의 전환기에 확고한 기반을 잡았고 대 해상교역과 식민지 경영을 힘의 기반으로 하여 공화국의 주인이 되었다. 영국의 경우, 평민과 같이 세금을 납부했다는 점에서 대륙의 특권계급과는 다르다. 영국은 가계와 관작을 제외하고 귀족과 상층 부르조아지의 차이가 없었으며, 해상 및 식민지 팽창과 종교개혁으로 이 두 계층간의 유대는 강화되었다. 군왕전제주의에 대항하는 역사는 대헌장부터 많은 선례가 있었고, 로크의 자연법 사상은 명예혁명을 정당화하였다. 그러나 영국의 자유에는 보편성이 결여되어 있었다. 가톨릭 국가보다 종교적 자유를 누렸지만, 완전한 사상의 자유는 인정되지 않았고 국교 유지되었으며, 특히 권리의 평등이란 문제가 결코 제기되지 조차 않았다. 그에 비해, 앵글로 색슨의 아메리카는 종교적 탄압, 전제주의와 특권계급으로부터의 도피한 청교도들의 자연권이 지닌 보편성을 독립혁명의 공법에 반영하여 아메리카인의 권리뿐 아니라 인간의 권리를 선언하고 종교의 자유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유색인종은 노예로써 그들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았고, 사상의 자유를 요구하지 않았으며, 그것은 오직 기독교인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으로 당연시되었다. 그리고 영국과 같이 평등을 요구하지 않았다. 부에 입각한 사회계서제 사회로 권리의 평등은 정치의 영역으로 확대되지 않고 재산제한선거제를 유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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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는 지리적, 사회적 관점에서 볼 때 유럽에서 중간적인 위치에 있다. 귀족들은 대륙국가의 군사적 성격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빈곤화됨으로써 더욱 배타적으로 되고 폐쇄적인 카스트로 변모했다. 동시에 해양국가로 식민지 팽창에 참여하였다. 교역은 영국에서만 크게 뒤질 뿐이었고, 산업 자본주의는 대륙에서 가장 선진적이었다. 프랑스 부르조아지는 영국에 비해 토지에 더 큰 집착을 보였다. 그렇지만 대륙의 그 어떤 나라에 비해 수나 영향력에서 가장 앞서 있었다.
프랑스 사회의 가장 고유한 특징은 관직매매제이다. 왕권은 관직의 일부를 경매에 붙여 부르주아지 재산의 일부를 잠식했으며, 경매의 가격을 올리거나 관직보유자의 지지를 획득하기 위해 관직에 집단적 특권뿐만 아니라 세습되거나 귀족작위를 수여하였다. 이와 동시에 법복귀족이 형성되었는데 재산의 관리면에서는 부르주아적이고, 직업상으로는 귀족은 아니지만 관직을 가진 평민이나 법률가들과 항상 관계를 유지하였다. 이로서 위는 귀족, 중간은 관직보유자, 아래는 평민을 포함하는 중간계급이 형성되었다. 이들은 권리의 개념, 합법적 질서의 개념, 고등법원의 등기권과 간주권 같은 제한군주제의 이념을 공유하였다. 여기에서 프랑스는 합리주의가 꽃피었으며 명사들과 더불어 통치한다는 전통이 유포되었다. 그리고 로크 및 자연권 사상이 나왔으며 철학과 과학연구가 활발해졌다. 왕권은 농촌을 영주들에게 맡기지 않아도 될 만큼 강력하였다. 영국에서는 특권계급이 엔클로저 운동을 통해 농민을 뿌리뽑았지만 프랑스 농민은 대부분 자유로운 토지 소유자였다.
프랑스의 귀족들은 여러 차례 무력으로 왕권에 대항했으나 사회가 변화함에 따라 여론이나 입헌적 전통 자연권에 호소하는 부르주아적 방법에 의존하게 되었다. 18C에서는 부르조아지의 성장과 그들의 열망을 반영하는 철학의 대두라는 측면이 강조되어 왔지만 동시에 특권계급의 영향력이 점증되던 시기이기도 했다. 흔히 간과되고 있는 것은 프랑스 혁명은 1787년에 시작되었으며 우리가 특권계급의 혁명이라고 부를 수 있는 국면을 그 초기에 지니고 있었다는 점이다. 특권계급은 국왕으로부터 3부회의 정기적인 소집에 입각하는 입헌체제 및 그들이 지사직을 장악하는 지방행정의 재조직이라는 양보를 얻어내려 하였다.
특권계급은 부르주아지가 발언권과 함께 권리 평등의 인정을 요구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사실상 그런 사태가 일어나자 권리의 평등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