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國遺事에 보이는 一然의 歷史認識에 대하여
- 최초 등록일
- 2010.12.09
- 최종 저작일
- 20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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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삼국사기에 보이는 일연의 역사서술에 대하여
목차
1. 서 언
2. 역사전통에 대한 새로운 인식
3. 전통의식의 내연과 그 발전적 부활
4. 결 언
본문내용
1. 서 언
『삼국유사(三國遺事)』는 고려후기의 충렬왕 7년(1281)경에 완성된 승려 일연(僧一然, 1206~1289)의 사찬(私撰)이다. 增補三國遺事(民衆書館本)의 崔南善의 解題 참조.
이는 불교신앙 관계를 포함하는 역사에 관한 문헌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는 사관(士官)이 왕명을 받아 삼국 및 통일신라의 역사를 편찬한 이른바 정사(正史)이다.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역시 당시 대표적인 교학승(敎學僧) 崔南善, 海東高僧傳解題(佛敎 37호, 1927)에 의하면, 『五冠山은 麗京에 있는 가장 著聞한 靈境이요(中京志 三山川及六寺刹 참조), 靈通寺는 具하여서는 大華嚴靈通寺라 칭하여 당시에 있어서 華嚴宗의 淵叢이던 곳이니, 저 大覺國師 같은 이도 本命으로써 그 遺骨 玆寺의 震方에 安厝케』한 곳이며, 賜紫沙門으로 玆寺에 住持함만으로도 覺訓의 常流아님』을 알 수 있다 하였고, 『그 法階의 높음과 한가지 有數한 學匠임을 알 것』이라 하였다.
이 왕명에 의해 편찬한 이른바 불교사(佛敎史)이다. 이 같이 두 정사가 엄존하는데도 일연은 왜 불교와 세속의 사실을 합쳐 『삼국유사』를 새롭게 편찬하게 되었을까.
『삼국유사』는 불과 5권에 지나지 않지만 그 다양함이나 치밀함이 『삼국사기』50권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압도적이다. 더구나 이 중에는 일연 자신이 직접 목도점검(目覩點檢)한 것이 상당수에 달한다. 이같이 광범한 사료 수집은 장기간에 걸친 용의주도한 노력을 요하는데, 이 노력이 30년에 걸친 처절한 대몽항전과 화맹의 난세 속에서 경주되었음 몽고군의 직접 침략은 고종 18년(1231), 一然의 26세 때부터였으며, 『三國遺事』의 집필이 끝난 것은 대체로 충렬왕 7년(1281), 그의 76세경이라는 것이다.
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이 같은 어려움을 딛고 일연이 『삼국유사』를 저술한 데는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일연 자신의 어떤 새로운 인식에서 우러난 의도적인 서사였다고 할 수 있다. 이 새로운 인식은 어디서 발원한 것일까.
참고 자료
김태영, <三國遺事에 보이는 一然의 歷史認識에 대하여>, 《韓國의 歷史認識》, 創作과 批評社, 1976
최남선,『증보 삼국유사』, 민중서관, 1973.
박진태 외,『삼국유사의 종합적 연구』, 서울: 박이정,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