폼페이 도시
- 최초 등록일
- 2010.12.09
- 최종 저작일
- 20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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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폼페이 형성 역사와 주요 건물
목차
폼페이 도시의 역사와 형성과정
중앙대광장
대경기장
목욕탕
대극장
주악당
원형경기장
주거지역
참고문헌
본문내용
폼페이 도시의 역사와 형성과정
이탈리아 토착세력 오스크인(Osci) 이 형성한 초기 부락은 선사시대에 용암이 흘러 층을 이룬 가파른 화산의 산마루에 자리잡고 있었다.
B.C.6세기, 중요한 해상무역로로서 전략적인 위치를 차지하던 이곳에 그리스인이 정착했다. 그들은 사르노 계곡과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도리아식 신전을 짓고 아폴로신 송배의식을 들여왔다. 그들은 신전을 복구했고 성벽을 쌓아 수비를 강화했으며, 도시를 확장해 나갔다. 그리스 인은 페이라이에우스(Peiraieús) 를 건설한 밀레투스의 히포다모스(Hippodamos) 의 원칙을 본떠서 도시에 기하학적 규칙성을 주었고, 남북을 축으로 삼아 소통을 원활하게 해주는 여러 갈래의 도로를 냈다.
이 오스크-그리스 풍의 도시는 아브루치(Abruzzi) 와 칼라브리아(Calabria) 에 살던 거칠고 잔인한 산악민인 삼니움족(Samnite) 에게 정복당했다. 해안지대의 평원에 자리잡은 삼니움족은 캄파니족으로 알려졌고, 로마는 강력한 군대를 동원하여 산악지대에 남아 있던 삼니움족을 복종시켰지만, 평원의 캄파니족과는 동맹를 맺었다. 이들은 끝까지 로마의 성실한 동맹자임을 고집했다.
주변 부족의 공격에서 도시를 방어하고, 로마로부터 독립을 지키고자 했던 폼페이는 도시의 수비체제를 더욱 철저히 했다. B.C.424년부터 B.C.89년까지 폼페이의 성벽은 더욱 견고해졌다.
남북 방향으로 쌓은 성벽은 옛 성벽 위에 증축 되었는데 이로써 도시가 남북 방향으로는 확장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반면에 동서 축을 중심으로 도시의 동쪽 구역이 그리스 도시를 본받아 상당히 발달했다.
삼니움족은 오늘날 알려져 있는 3,014m에 달하는 도시의 경계를 형성했다. 삼니움족은 또한 도시의 주요 간선도로를 건설했다. 그들의 목적은 세모꼴광장과 광장에 있는 기념물군을 시민광장과 연결시키려는 데 있었다.
참고 자료
로베르 에티엔, 주명철역, 1995, 폼페이 최후의 날, 시공사
승효상, 2004, [세계도시 건축 순례] 이탈리아 폼페이, 중앙일보, 중아일보 2월6일 21면
http://en.wikipedia.org/wiki/Main_Page
http://www.encyber.com/index.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