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인문콘텐츠] 처인성 전투의 콘텐츠 활용방안에 대하여
- 최초 등록일
- 2010.12.04
- 최종 저작일
- 20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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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역사 인문콘텐츠] 처인성 전투의 콘텐츠 활용방안에 대하여
목차
1.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처인성 전투
2. 선정 이유
3. 처인성 전투와 관련된 기존 콘텐츠의 문제점
4. 개선 방안
(1) 판타지적 요소의 도입
(2) 새로운 캐릭터의 개발
(3) 기독교적 세계관과의 차별성
5. 결 론
6. 참고문헌
본문내용
1.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처인성 전투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처인성 전투는 서기 1232년, 몽골의 2차 침입시기 오늘날 용인지역인 처인성에서 벌어졌던 소규모 국지전으로, <고려사> 고종 19년 조에 간략히 기술되어있다.
高麗史 世家 23券 高宗 壬辰 19年(1232) 中
撒禮塔攻處仁城有一僧避兵在城中射殺之.
荅東眞書曰夫所謂蒙古者猜忍莫甚雖和之不足以信之則我朝之與好非必出於本意然如前書所通越. 己卯 歲於江東城勢有不得已因有和好之約 是以年前其軍馬之來也彼雖背盟棄信肆虐如此我朝以謂寧使曲在彼耳庶不欲效尤故遂接遇如初以禮遣之今國朝雖遷徙都邑當其軍馬之來則猶待之彌篤而彼尙略不顧此意橫行遠近外境殘暴寇掠與昔尤甚由是四方州郡莫不嬰城堅守或阻水自固以觀其變而彼益有呑啖之志以圖攻取則其在列郡豈必拘國之指揮與交包禍之人自速養虎被噬之患耶於是非特入守而已或往往有因民之不忍出與之戰殺獲官人士卒不爲不多矣至 今年十二月十六日水州屬邑處仁部曲之小城方與對戰射中魁帥撒禮塔殺之俘虜亦多餘衆潰散 自是褫氣不得安止似已回軍前去然不以一時鳩集而歸或先行或落後欲東欲北故不可指定日期又莫知向甚處去也請貴國密令偵諜可也.
이에 대한 해석은 다음과 같다.
살례탑(撒禮塔)이 처인성(處仁城)을 침공하므로 어떤 중(僧) 한 사람이 난리를 피하여 성 안에 있다가 살례탑을 쏘아 죽였다. 동진(東眞)에 보낸 회답 편지 내용은 다음과 같다.
“소위 몽고란 나라는 시기심이 아주 심하여 화친을 하였다 하여도 믿을 나위가 없으니 우리 나라에서 그들과 좋게 지낸 것은 꼭 본의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전번 편지에 말한 바와 같이 지난 기묘년에 강동(江東)성에서는 형세가 할 수 없게 되어 거기서 화친에 대한 약속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연전에 그들의 군사가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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