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최후를 읽고
- 최초 등록일
- 2010.11.26
- 최종 저작일
- 20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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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18세기에 전 세계는 구조적 재편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제국주의라는 논리를 바탕으로 지속적으로 동양에서 문물을 수용해가던 서양이 상황을 역전하였다. 세계의 은 이동을 보면 17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아메리카 -> 유럽 -> 중국(+인도) 이었던 것이, 유럽의 식민 사업이 본격화되면서 유럽으로 은이 모이게 되었다. 유럽에서 시작된 기계생산이 높은 문화력과 상품 생산력을 자랑하던 중국의 생산성을 능가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아편전쟁으로 인해 군사력 면에서도 유렵 세력에 굴복하게 되면서 세계구조의 새 판이 짜여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목차
1. 들어가며
2. 양이와 구조적 한계
3. 대안적 세력의 아쉬움
본문내용
18세기에 전 세계는 구조적 재편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제국주의라는 논리를 바탕으로 지속적으로 동양에서 문물을 수용해가던 서양이 상황을 역전하였다. 세계의 은 이동을 보면 17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아메리카 -> 유럽 -> 중국(+인도) 이었던 것이, 유럽의 식민 사업이 본격화되면서 유럽으로 은이 모이게 되었다. 유럽에서 시작된 기계생산이 높은 문화력과 상품 생산력을 자랑하던 중국의 생산성을 능가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아편전쟁으로 인해 군사력 면에서도 유렵 세력에 굴복하게 되면서 세계구조의 새 판이 짜여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은 대대로 중국을 종주국으로 섬기며 명맥을 이어온 나라였다. 명나라와 청나라에 정기적으로 사신을 보내고 진상하면서 중국의 세계 유지 논리인 조공체제에 합류하였고 문화적, 경제적으로 앞서있던 중국의 문물을 수용해 왔다. 중국에 종속되었나 주체적이었나 하는 논의는 차치하더라도 어느 편이 더 강대국이었으며 세계 질서의 큰 축을 구성하고 있었는지는 명백하다. 18세기의 중국은 기존의 종주국으로서의 힘을 상실해가고 있었으나 조선은 역사의 맥락을 읽어내지 못하고 ‘중화 말고는 다 오랑캐다’라는 인식을 고수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18세기의 조선은 정치적으로도 부패해 사회를 온전히 이끌 리더십이 부재해 있었다.
2. 양이와 구조적 한계
중화는 세계의 중심을 중국으로 한정하여 중국 이외의 나라는 모두 오랑캐로 여기는 오만하지만 다소 현실이 반영된 세계논리였다. 식량생산이나 상품생산이나 무엇이든 세계 최고였던 중국이었고 방대한 내수시장과 풍부한 자원으로 교역의 필요성을 못 느끼는 중국으로서는 어찌 보면 당연한 세계관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18세기에 세계정세는 바뀌었다. 기존의 세계관에 갇혀서는 역전된 상황을 재역전할 동인을 이끌어낼 수가 없었다. 그런데 17세기 청나라의 등장과 함께 조선은 자기합리화의 이데올로기로 소중화를 표방한다. 오랑캐로 여겨왔던 만주족의 나라를 중화로 여기기 싫고, 두 차례의 호란으로 굴욕적인 패배를 경험한 조선은 지속적으로 신봉해오던 중화의 명맥을 자신에게 끌어오면서 창피함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