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현대사
- 최초 등록일
- 2010.11.23
- 최종 저작일
- 20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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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현대사 요약문
목차
1948년 5. 10 총선
5. 10 총선 결과
4. 19 혁명
4. 19 혁명 후 진보주의 운동
5.16 군사쿠테타
국가재건최고회의
참고 5대 대선의 사상논쟁
한일회담
삼선개헌
10월 유신
긴급조치 시대
본문내용
1948년 5. 10 총선
1948년 12월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에 따라 1946년 3월 1차 회담과 47년 5월 2차 회담이 회담 참석 사회 단체에 대한 이견으로 모두 결렬되자 미국은 47년 9월 한국 문제를 유엔 총회 의제로 상정하고, 유엔총회는 11월 유엔감시하의 총선 실시, 유엔한국임시위원단 설치, 정부 수립 후 미소양군 철수안을 가결한다.
1948년 1월 유엔임시위원단(UNTCOK, 호주, 캐나다, 중국, 엘살바도르, 프랑스, 인도, 필리핀, 시리아 8개국, 우크라이나는 참여 거부) 35 명이 서울에 들어오고 소련은 입북을 거부한다.
위원단은 좌익인사들과는 접촉할 수 없었고 우익 인사들 중에서도 김구, 김규식 같은 단선 반대 세력이 많다는 것을 알았고, 당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자유로운 선거가 실시될 수 있을지 걱정하면서 2월 9일 다수결로 유엔에서 결정을 내려달라고 요청했다. 2월 유엔소총회는 위원단이 활동을 계속할 것과 선거 실시가 가능한 지역에서의 선거를 감시할 것을 결정했다. 위원단은 논란 끝에 미군정이 제시한 5월 선거안을 찬성 4, 반대 2(호주, 캐나다), 기권 2로 가결한다.
북한 당국의 집계 발표에 의하면 북한에서는 총 유권자의 99.97%가 투표하였고, 반면에 남한에서는 총 유권자 1,745만 명 중 77.52% 가 비밀 선거에 참여한 것으로 밝혀졌다. 남한에서의 투표자 수는 5.10 단독선거의 그것보다 65만명이 더 많은 것으로 되어 있다.
5. 10 총선 결과
남로당 등 좌익계 선거 거부, 중도 계열 근로인민당, 김구 한독당,, 김규식 민족자주연맹 불참 속에 이승만 독촉계 및 한민당 계 대거 당선
이승만은 5월 31일 초대 제헌의회 의장으로 선출되었고 곧 헌법 제정에 착수, 30명으로 된 기초위원 (위원장 서상일)과 유진오 씨 등 6명의 전문위원을 선정하였다. 당시 전문위원단 초안은 바이마르 공화국을 모델로 한 내각책임제 헌법안이었으나 이승만이 강력히 반발하여 대통령제에 의원내각제를 절충한 묘한 헌법안이 7월 12일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