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테네 민주정
- 최초 등록일
- 2010.11.22
- 최종 저작일
- 20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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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아테네 민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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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클레이스테네스*는
부족제의 개편, 도편 추방법(오스트라시즘)의 실시, 500인회의 설치 등을
통하여 민주 정치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아테네의 아르콘(최고 행정관)이 되어 일반 시민들로 이루어진 민회와 결합해서 귀족세력을 견제하며 민주적 개혁을 시행했습니다. 그 덕분에 개개인은 가문과 씨족에 상관없이 지역의 시민으로서 동등하게 공직을 맡을 수 있게 되었죠.
아테네 민주정의 창시자로 여겨진다. 아테네 시의 최고 행정관(아르콘)을 지냈다(BC 525~524). 귀족세력을 견제해 일반 시민들로 이루어진 민회와 연합했으며(BC 508) 민주적 개혁을 시행했다. 그의 혁신안 중 가장 중요한 것으로는 개개인이 정치적 책임을 씨족의 성원으로서가 아니라 지역 시민으로서 맡게 된 것을 들 수 있다.
클레이스테네스는 예로부터 아테네의 지도층이었던 알크마이온 가문 출신이었다. 그가 태어났을 당시 그의 집안은 증조할아버지 메가클레스가 저지른 행위 때문에 사회의 배척을 받고 있었다. BC 632년경 아테네의 귀족 킬론이 아크로폴리스를 장악하고 스스로 참주가 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을 때 메가클레스는 아테네의 최고 행정관이었다. 킬론의 몇몇 추종자들은 제단으로 도망쳤으며 자신들의 신변안전을 보장받은 뒤 제단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그들은 죽음을 당했는데 이는 메가클레스에게 책임이 있었다. 델포이 신전 아폴론의 신탁에 따라 알크마이온 가문 사람들에게는 저주가 내렸으며 추방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알크마이온 가문은 BC 594년 입법자 솔론이 내란종식을 위해 소환되었을 때 아테네로 돌아왔다. 메가클레스의 아들 알크마이온은 델포이를 지키기 위한 신성전쟁 때 시키온의 강력한 군주(그의 이름 역시 클레이스테네스였음) 및 테살리아에 맞서 아테네인을 이끌고 싸웠다. 이후 시키온의 참주는 자신의 딸 아카리스테의 남편으로 알크마이온의 아들인 메가클레스(할아버지 이름을 땄음)를 골랐다(BC 574경). 이들의 첫아들은 외할아버지의 이름을 따 클레이스테네스라고 이름지어졌다.
솔론의 개혁 이후 아티카는 안정을 찾지 못했다. 구귀족은 솔론이 너무 지나쳤다고 생각하여 대세를 역전시키려고 열망한 반면 평민측은 솔론의 개혁이 불충분했다고 생각했다. 옛날의 과오로 귀족층과는 멀어진 알크마이온 가문은 솔론의 개혁에 입각한 중도적인 입장을 옹호했다. 그러나 귀족층과 평민층은 BC 560년 빈민계층의 지지를 받고 있는 군사적 명성의 소유자인 귀족 페이시스트라토스에게 권력을 양도해야 했다. 그와 권력을 나누어 가지려다 실패한 알크마이온 가문은 곧 그를 반대하는 세력에 가담했다. 그러나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전력을 키워 그들을 패배시켰으며 알크마이온 가문 사람들은 다시 아티카를 떠나야 했다(BC 546). 당시 25세였던 클레이스테네스는 이후 20년 동안 돌아오지 못했다. 그의 아버지에 관한 사실은 더이상 알려져 있지 않으며 아마도 페이시스트라토스보다 먼저 죽은 것으로 보인다. 알크마이온 가문은 신성전쟁에 참여해 델포이인의 환심을 샀고 BC 548년경 불타버린 아폴론 신전 복구에 기여함으로써 더욱 큰 지지를 받게 되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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